제 생각의 단초들을 좀 정리했습니다.

그간 이곳에 자리를 내주신 훈님께 감사드립니다.

 

가난한 사색

 

저는 어제 대화 중 한 친구에게 너는 독단적이다 공격적이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지금의 저는 그렇습니다.

그럼 왜 그럴까? 그리고 그렇다면 그걸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폭력적이고 독단적이고 이건 정말 민주적인 자세와는 상극이 아닌가. 심지어는 아무리 좋은 목적일지라도 목적은 수단을 합리화 시킬 수 없는 거 아닐까요? . 옳습니다. 그럼 나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당분간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위의 저 말은 절반만 진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좋은 말이지만.

 물론 전 나쁘진 않지만 좋은 인간도 아닙니다. 가끔 남의 환상의 풍선을 터트리는 짓을 하기도 하고. 우스개 소리를 한번 해 볼 까요. 유럽의 한 고색창연한 역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커피 맛이 좀 그랬습니다. 함께 있던 친구가 투덜거리더군요. 제 말이 역전다방커피 맛이 다 그렇지 뭐 죽는다고 웃더니 좀 섭섭해 하더군요. 뭔가 침탈당한 기분이었을 겁니다. 한 가지 더해 볼까요? 이거야 흔한 소리지만 우리의 비행기 안내양들은 왜 그렇게 고급합니까? 젊고 미인이어야 하고 어학도 잘해야 하고 날씬해야 하고. 제가 듣기로 그거 중노동입니다. 그거 하는 아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기압에 적응해야 하고 허리가 튼튼해야 하고 끝없이 시차적응 해야 하고왜 그녀들은 그렇게도 미소 훈련을 해야만 하나요?여성 아나운서들과 기상캐스터들과 더불어 그녀들의 미소는 이 땅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전 규정적인 의미의 페미니스트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들을 위로하고 싶어합니다-   하여튼 인력낭비 이상하게 합니다.       

 

여하간, 위의 저 말에는 분명한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겸손해야 할까요? 저 생각은 까딱하면 모든 것을 스스로 蕪화시키는 데로 비약될 가능성이 있어요. 간단히 요약하면 발언 에는 그것의 주체가 되는 개인의 책임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좀 더 객관적인 관찰 또한 요구됩니다. 그것은 그 화자의 영향력, 발언의 목적과 목표와 그것의 적확성과 개인적 특성 등.-웃기는 이야기지만 저는 늘 거울을 보고 있는 나를 또한 봅니다.

불행하게도 저 사려 깊은 의식은 내적인 반성력을 잠재하고 있을지라도 겉으론 창궐하는 무관심과 불신을 조장하는 또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 있습니다. 니체는 파시즘에 인용되기도 하고 마리네티는 파시즘을 찬양하는 길로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겠습니까? 반대로 이것들, 자기 안의 파시즘을 경계하는 글들이 힘을 얻을 때 그것들은 분명히 사려 깊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결국 그것들이 어디에 봉사하게 되는 지를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요? 그런데 왜 그것이 필요하고 어떤 때 유용했을까요? 그것은 상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는 무너지고 막스는 사라졌고-이 지점에서 반성이 시작됐겠지요-그러나 세계화는 이미 다 접수된 것 같고.. . 삶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파편화 된 것 같기도 하고 어디로 가는 지 도무지 감이 안 오고 이건 곧장 무기력증으로 우릴 인도합니다. 그럼 어쩌라고?

 

그 친구는 또 이런 논지의 말을 했습니다. 네가 문제를 느낀다면 그것을 충분히 연구해서 말을 해라 옳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도 역시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약은 약사에게 병은 의사에게라는 슬로건 같이 들리는, 질서와 권위에 봉사하는, 사람의 입을 닥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함정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렇게나 혹은 무책임하게 말하고 살겠다라는-^^ 제겐 그런 무책임한 기질이 없지 않습니다만-의지가 발동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형편없는 친구여서가 아닙니다. 그 친구는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입장이지만 그러면서도 그처럼 민주적이기도 어려울 만큼 민주적인 인간성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도 내가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았나 싶은 데 아니면 그의 사회적 입장이 이렇게 그를 전문가 편향적으로 바꿔 버린 것일 까요? 뭐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생짜배기 소릴 하자면 우리는 계속 무기력해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온통 다 자본에 침식되고 점령되고 모든 세계는 똑같은 물이 들어가고 영어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게 되고 과학 기술과 사이버 세계는 정보의 민주화란 미명하에 인간을 사이버적으로 관념화 시키고 파편화를 가속화 시키고 한 쪽에선 굶어 죽고 아이들이 착취되는 동안 한쪽 미국에선 부잣집 외동딸이 마약에 심취해서 자살해 죽고 그게 만화경이니 그대로 돌아가도록 두면 알아서 제 자릴 찾아가리란 것일까요? 세상은 본래 그런 거야 라고 말하면서 손을 놓고 주눅든 채, 혹은 도사가 된 채 살아가야 하는 건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뭐 누가 손 쓸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당연히 듭니다만.

  

그럼 저란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은 뭘 믿고 이런 횡설 수설 하는 뻔뻔한 소리를 하고 있을까요? 여기서 뻔뻔하다라는 것은 제가 제 이름의 권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논리도 연구도 아무 준비 안돼있으면서 말들을 겁 없이 하고 있다라는 측면에서 입니다.

실제로 저는 그렇게 준비 없고 싹수 없이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왜 말해선 안 되는 가? 라고 되묻습니다. 왜 준비된 자들만 말할 수 있는 것일 까요? 왜 당신은 지금 말하면 안됩니까?

 

전 사변적이고 바리에이션이 심한 인간이고 뭘 이루워 본 적도 없고 그 이상 뛰어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왜 아닐까요? 왜 그럴까요?

이유는 우리의 사색과 분노에도 유통기한이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에는 말입니다. 폐기물 처리장으로 가기 전에 효용성이 있다면 우리는 발언을 해야 합니다. 무슨 소릴까요? 우린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분노에는 일정량의 소중한 진실이 있습니다. 내가 독단적이고 공격적이었을 때 나는 무엇에 대해 독단적인 자세로 공격적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착각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게 착각이라면 그건 시간이 다시 나를 깨우쳐주겠지요.

 

저는 말에서건 뭐건 영구적 효용성 같은 걸 원치 않습니다.

이것은 친구들에게 한바탕 농담이 되었습니다만 구원을 피해가는 일은 어려워요.^^ 즉 이 영원성과 죄 사함에 대한 욕구를 피해가긴 어렵단 것입니다. 영혼을 가벼이 순결하게 만들고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혹은 우측이든 좌측이든 신념의 화신이 되어 구원에 봉사하고 그런 것들을 말합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구원을 요구하고 호소하는 지얼마나 구원은 쉽게 잡히는 곳에 널려있는지.., 정말이지 그것을 피해가는 일은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요는, 내가 전달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 그러나 그것이 도를 넘는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이 말은 너무 많은 것을 사색하고 너무 많은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 또는 완벽주의자의 그런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를 말합니다.- 나는 나 자신이 얼마간 독단적이 되어도 된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깨의 힘을 빼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려 깊어지는 일도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달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대화가 시작될 때 제가 중요하다고 방점을 찍게 된 부분이 전달이라는 것인데. 에너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념이라든가 확신이라든가 그런 단어들과 관계됩니다. 즉 사기 나 착각 같은, 위험성을 내포한 단어들에 제가 발 담고 있다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제가 여기에 필이 꽂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린 우선적으로 본능적인 생명력을 회복해야만 그 다음 무엇이 가능하다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기라는 것은 나무가 물을 빨아들이듯 스스로 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자극하고 싶어하고.

 

우린 그렇지 않아도 작은 데 왜 늘 더 작아져야만 합니까?

 

어찌 보면 딱한 이야기이지만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즘 우리는 타인은 물론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믿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거짓된 희망이 입니다. 진실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색의 탐험은 그 길이 절대 끝나지 않는 영원히 갈라지는 두 갈래길이란 것입니다. 좀 비약하자면 우리는 종국엔 아무런 발언도 할 수 없고 그 끝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그런 세계로 혹은 소용돌이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 길은 관 뚜껑이 그렇듯 늘 보장 되어 있어요. 노자와 장자의 세계가 서양의 지적인 사색가들에게 유행처럼 보장된 종국이듯이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디에 도달 하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가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해질 때 어딘가에 도달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목표지가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잘 합니다. 현상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살고 있는 존재들이 무력하나마 생명체라는 사실들을 잘 잊습니다. 그것이 비관을 낳기도 하고 긍정을 낳기도 하는 데 저는 오늘 우리가 하는 짓이 우리 미래를 결정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거대한 골프 연습장의 녹색 그물 같은 것이 우리 머리 위에서 언제든 우릴 잡아 올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할 수야 있나요?^^!

 

약간 덧붙인다면 저는 이전달력의 문제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 어지간한 말 잔치로는 호소력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 우리 상황이라는 것인데. 제가 요즘 한 약간의 짓들을 살펴보면 저는 전혀 친절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상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제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도 할 뿐 더러 그럴 능력도 안되지만, 제 의식 밑에서 이놈의 세계에서 정보란 것들은 이제 쓰레기 더미처럼 넘쳐나면서 마치 쓰레기 더미의 파도처럼 사람들도 휩쓸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쓰레기장으로. 예술의 경우 그것들도 지식화될 경우 대개는 장식품으로 쓰이는데 친절하게 무슨 자투리 지식을 덧붙이거나 해야 할 이유는 없겠죠? 제대로 연구나 해서 그런다면 모를까 말입니다.

 

하는 건 없지만 여기서 제가 하고 있는 짓들에 대해 자상해야 할만한 이유를 느끼지 않습니다. 제가 시간 들여 일일이 지식을 첨부한들 조금만 조사하고 뒤지면 다 나오는 그것들 보다 나을 것도 없을뿐더러 관심이 있다면 떠 먹이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건 아무런 정보 없이 그것들을 보면서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다면 그러길 원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무책임해서이기도 하지만.

 

영상에 대해 할 말이 있군요. 우연이었지만 유 튜브에 필이 꽂혀 그걸 쓰는데 그건 양가 효과를 발휘합니다. 영화와 같은 경우, 전체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워 그걸 제대로 공급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문제작 같은 걸 들추어 내는 일이 어렵지 않고, 음악의 경우를 보면, 우리는 누가 어떻게 그걸 만들거나 연주했는지를 궁금해 하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엔 영상을 제공하는 것은 꿈을 깨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제 입장으로 파악하면, 저는 영상 없이 듣는 쪽이 좋습니다. 왜냐? 실재하는 존재 누구 누구의 연주라거나 혹은 그 연주자의 모습을 보는 건 감상을 방해하는 측면이 강해서 입니다. 호기심과 궁금증은 잠깐에 불과합니다.-신화와 공상을 깨뜨리는 것은 영상에 드러나는 연주자들의 모습과도 관계가 없지 않습니다. 음악에 대한 환상을 실재 인간의 모습과 접목시켜 마음속의 신화들을 깨주면서 제대로 자리잡게 해주는 효과가 알게 모르게 있습니다. 의미 부여를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여기엔 어떤 영상을 선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물론 개입됩니다 제 무성의가 큰일이긴 하지만, 다른 하나는, 제가 선별하는 것들과 관계가 있습니다만 저는 무언가 도발을 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면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데 그건 그래야 포르노그라피가 되는 것을, 습해지는 것을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럼 전 뭘 하고 싶어하나요? 원대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사람들의 거세된 기운들을 일으켜주고 싶고 쳐진 것들을 위로하고 싶고 현실의 실체를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너절한 쓰레기 더미 하나의 사진일지라도 그것이 미적인 힘을 갖춘 그런 것들을 사용하기를 저는 원합니다. 우리 개개인의 존엄성을 우리는 다시 확인해야 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도구를 통해서지만요.

 

다시 말하지만,

그 앞서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파 논리가 아닌가요?  엉뚱하게도 결정적 순간이란 어휘가 떠오르는 데 의미가 아니라 어휘만 채용하면 그 결정적 순간을 넘어버리면 저런 생각들은 우파 논리로 가게 됩니다. 파시즘을 양산하게 되고 폭력을 정당화 시키고. 생각을 강요하게 되고 그런데 한번 더 요약하면 우린 얼마나 더 순진하고 겸손해야 하나요? 그 겸손이 혹시 뭔가로부터 도망 치고자 하는 비겁이나 교활은 아닌가요? . 끝없는 개인적 각성, 인격의 도야, 한없이 민주적인 수용  그건 도를 닦는 일이지 사회와 삶을 다루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끝없는 선택 속에 살아갑니다. 결국 말해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도 방대하고 거대한 그물 안에서 자유로운 듯이, 마치 실재로 내가 무엇을 선택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렇다고 해서 내 선택이 선택이 아닌 것은 또한 아닙니다. 그러니 무언가 틈새만으로 달팽이 집 속으로만 빠져나가려고만 애쓰지 맙시다.

 

        

우리는 인내해야 하고 오래 참아야 하고 사색해야 하고 멀리 보아야 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고 냉철해야 하고 그렇습니다. 옳아요.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직정적인 호소력의 상실입니다. 그리고 시니시즘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해요. 저는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좀 천하고 조야한 것에 대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시적인 정서에 대해 이야기 하는 중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자신의 판단력을 좀 더 냉철하게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지만 대개의 경우, 시간의 개입에 의해 우리는 형식을 완성시키기 위해 내용물을 놓쳐버리기 일쑤이고 최초에서 저 멀리 다른 곳에 이르러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일쑤입니다. 시간과 사색이라는 것 품위와 가치라고 하는 것들이 상호 작용하는 결과가 그런 것들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좋은 것을 얻어내기도 하고 그것은 귀중하고 존경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우리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닐 뿐 더러 그런 장인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좋은 것들을 향수하는 주체가 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론 만들어내는 당사자들 조차도 말이지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애초의 그 무엇을 잃어버리고 그것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어렴풋히 생각날 뿐 희미한 옛사랑의 기억 같은 그것을 안은 채로 조로해 버립니다. 말을 잃은 채.   

 

모든 글들은 소통과 설득을 지향합니다. 무엇에 대한 소통이고 설득인가 하면 그건 당연히 글 쓰는 자로부터 출발합니다. 말하는 자의 의지와 욕구, 욕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읽히는 가하는 문제는 또 다른 이야기이므로 생략합니다. 이야기도 그렇겠지요. 우리는 무언가 전달하고자 입을 엽니다. 심지어는 단 한마디의 한숨 소리 조차도 듣는 자에겐 시사하는 바를 가집니다. 그래서 우린 책임을 져야 하기도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미리 자기 관을 준비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제가 전하고 싶은 것은 좀 살아보자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살아나야 우리 모두가 삽니다.

 

  쓰다 보니 견강부회에다가 동어반복에다가 무책임을 부추기는 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