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그림은 Cy Tomwbly /Untiled 1971년 작이고
verbal silence의 대가란 평이 붙었네요. 톰블리의 무의 개념과 아래 도덕경을 해석한
무의 개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겠어요.
아래 의견에 찬성이시니 다른 각도이신지 생각해보는 거 재밌을 거 같은데...
유와 무와 톰블리 그림의 침묵을 막 갖다가 붙였네요.
이음새는 뭐 알아서들...^^
전 뭐 아는 거 없으니까요.
제가 생각해도 포스팅이 엉뚱합니다 ^^ 도무지 어디로 튀는지 저도 모르는 시간들을 지내고 있는 중이라서요. ^^
즐거운 시간인 셈이죠.
혹시나 침묵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지금은 저자 생각도 잘안나는데 '침묵의 세계라는 피카르트(?)란 사람의
에세이가 생각나구요. 그리고 그 영화 수도원을 찾아가 12년맘에 허락을 받아 촬영했다는 그 영화가 생각나는 군요
영화는 비교적 최근 작이죠...
문제는 우리가 사는 현대에서 얼마나 침묵을 소유하고 살 수 있는가란 것이겠지요...
이 와글거리는 세상도 한판 화엄 쯤으로 생각하면 그것도 견딜만할 거 같긴 한데
그게 뭐 늘 쉬운 건 또 아니니까...
Post-Scriptum.
It has been said that Cy Twombly's paintings resemble writing, or are a kind of écriture. Certain critics have seen parallels between his canvases and wall graffiti. This makes sense. In my experience, however, his paintings refer to more than all the walls I pass in cities and gaze at, or the walls on which I too once scrawled names and drew diagrams; his paintings, as I see them, touch upon something fundamental to a writer's relationship with her or his language.
A writer continually struggles for clarity against the language he's using or, more accurately, against the common usage of that language. He doesn't see language with the readability and clarity of something printed out. He sees it, rather as a terrain full of illegibilities, hidden paths, impasses, surprises, and obscurities. Its maps is not a dictionary but the whole of literature and perhaps everything ever said. It's obscurities, it's lost senses, its self-effacement come about for many reasons - because of the way words modify each other, write themselves over each other, cancel one another out, because the unsaid always counts for as much, or more, than the said, and because language can never cover what it signifies. Language is always an abbreviation.
It was Proust who once remarked that all true poetry consists of words written in a foreign language. Every one of us is born with a mother tongue. Yet poetry is motherless.
I'll try to make what I'm saying simpler. From time to time I exchange letters and drawings with a Spanish friend. I do not (unhappily) speak Spanish, I know a few words, and I can use a dictionary. Often in the letters I receive there are quotations in Spanish from poets - Borges, Juarroz, Neruda, Lorca. And I reply with other quotations of poems in Spanish, which I have sought out. The letters are hand-written and, as I carefully trace the letters of strange words in what is to me a foreign tongue, I have the sense, as at no other time, of walking in the furrows of a poem, across the terrain of poetry.
Cy Twombly's paintings are for me landscapes of this foreign and yet familiar terrain. Some of them appear to be laid out under a blinding noon sun, others have been found by touch at night. In neither case can any dictionary of words be referred to, for the light does not allow it. Here in these mysterious paintings we have to rely on upon other accuracies: accuracies of tact, of longing, of loss, of expectation.
I know of no other visual Western artist who has created an oeuvre that visualizes with living colors the silent space that exists between and around words. Cy Twombly is the painterly master of verbal silence.
Copyright John Berger 2002.
(Audible Silence: Cy Twombly at Daros)

어떤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노자 도덕경입니다.
도덕경 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故常無, 欲而觀其妙
常有, 欲而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같이 있다는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로다
.........
노자는 세계를 개괄하는 대표적인 두 범주, 즉 세계의 대표적인 두 차원 혹은 영역인 '무와 유'를 발생론적인 선후 관계로 보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듯 무가 먼저이고 유가 나중인 것이 아니라, 유와 무는 공존하고 서로 협력한다. 즉 같이 나와 있는 것이다.
더 일반적인 오해인, 무를 도의 속성으로 이해하여 도와 무를 같은 레벨에 놓거나 혹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무가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유보다 선행한다는 관점이다. 이 역시 잘못된 이해이다.
노자에 의하면 두 대립면인 유와 무가 같은 차원에서 서로 꼬여 있음이 세계의 근본적인 존재 형식이자 운행 원칙이다.
바로 이런 원칙이 이 세계의 만물이 들락거리는 문으로 비유된다.
문은 '만물이 발생되어 나오는 곳'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문은 들어가고 나감이 교차하는 '묘한' 공간이다.
즉 종착역이나 시발역이 아니라 환승역이며, 들기도하고 나기도 하는 경계이다
도덕경 11장
三十輻共一穀,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삼십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곡에 모이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수레의 기능이 있게 된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그릇의 기능이 있게 된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방의 기능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유는 이로움을 내주고,
무는 기능을 하게 된다.
....................
흔히 노자를 해석하면서 겪는 오해 중 하나는
왕필본의 해석을 따라가는 데 있다
왕필은 이 구절을
"곡이 30개의 바큇살을 통괄할 수 있는 것은 무 때문이다.
무는 사물들의 온갖 현상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음으로서 많음을 통괄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즉, 왕필은
적음의 궁극점인 무가 곧 도이며, 많음의 집합인 유의 근거가 된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많고 다양한 현상의 존재들이 하나의 무를 근거로 통일되어 있고,
무는 유의 통일성 및 합리성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기실 노자는 그러하지 않다
노자에 따르면, 무와 유는 본체와 현상이라든지,
근거와 구체, 적음과 많음 등과 같은 질적 차등 속에 있지 않다
단지, 무와 유는 대등한 차원에 있는 대립면일 따름이다
단지, 무는 용이라는 역할을 하고, 유는 이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노자는 사물의 대립과 모순을 상호 의존하고 상호 전화하는 관계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대립하는 쌍방은 절대적으로 상호 배척하거나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재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그러하다, 자연이 그러하고, 도가 그러하듯이,
서로 상반되면서 서로 완성시킨다
다음은 웃자고 넣는 에피소드
NASA에서 우주인을 우주로 쏘아 올릴 무렵 무중력 상태에서는
볼펜이 제구실을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사의 과학자들은 10여 년간 1200만 달라를 써가면서,
무중력상태에서도 사용가능하고,
뒤집어도 끄떡 없고,
물 속에서도 잘 써지고,
유리 표면처럼 잘 써지지 않는 데에도 잘 써지며,
섭씨 영하 300도에서도 써지는 볼펜을 만들었다.
그러나, 러시아 우주인은 그냥 '연필'을 쓴다고 한다.
바오로 서원을 보니 광화문 구세군 회관 1층에 있던 <생명의 말씀사>가 생각나요.
고등학생때 친구하고 그곳에만 있는 예쁜 카드를 사기위해 많이 갔었거든요.
너무 예뻐서 누구한테 줄 수도 없었던 카드들을 왜 그렇게 열심히 사모았는지...
그 시절의 과잉이죠^^
이번주부터 바디우 <조건들> 을 시작으로 스터디를 해요. 이건 현재의 과잉이구요.
장소를 언젠가 알려주신 연탄공장-영어로 뭔지 잊어버렸어요- 으로 하고 싶었는데
부산에서 올라오신 분이 넘 춥다고 당분간은 동네 별다방이나 콩다방에서 하자네요.^^
언젠가 가게되면 소감을 올릴께요.
그리고 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와 희곡부문 당선작 읽어보세요.~~
참 착한 분이실 듯 해요.^^
전 필요한 공부도 안하는 결핍 투성이 인데..
'연탄공장' 아니구요. '무연탄'입니다. ^^
멋진 곳이에요. 편하고 아직은 한적하기도 하고.(예쁜 곳은 아니에요)
저도 자주 가진 못하지만.
카드는 친구 분들 막 나눠 주세요. 좋챦아요. 기뻐하는 것도 보고.
읽어보도록 할게요. 조선일보란 이름이 본 지 하도 오래 오래전이라
좀 낯설게 느껴지는 데 이번 기회에 그 신문이 존재하고 있음을 체감해 봐야겠네요. ^^
마치 파릇한 봄이 온 거 같네요. 말씀을 듣고 있자니...
닉 네임 이런 거 어떨까요? 瑞雪, 혹은 firstsong...
꼭 하시란 거 아니구요 ^^
반갑습니다. ^^
희곡은 못 읽었고 시는 읽었습니다.
참하네요. 언어유희나 기술보다 사고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좋아보이네요.
언젠가는 유영이 아니라 땅에 발을 붙일 때도 오겠죠 ^^ 우주선에 사는 것도 아닌데.
그냥 농담입니다.
자본주의의 약속
- 함민복
혜화동 대학로로 나와요 장미빛 인생 알아요 왜 학림다방 쪽 몰라요 그럼 어디 알아요 파랑새 극장 거기 말고 바탕골소극장 거기는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하니까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는 곳 아 바로 그 앞 알파포스타칼라나 그 옆 버드하우스 몰라 그럼 대체 어딜 아는 거요 거 간판좀 보고 다니쇼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오감도 위 옥스퍼드와 슈만과 클라라 사이 골목에 있는 소금창고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라는 카페 생긴 골목 그러니까 소리창고 쪽으로 샹베르샤유 스카이파크 밑 파리 크라상과 호프 시티 건너편요 또 모른다고 어떻게 다 몰라요 반체제인산가 그럼 지난번 만났던 성대 앞 포트폴리오 어디요 비어 시티 거긴 또 어떻게 알아 좋아요 그럼 비어 시티 OK 비어시티...
그냥 소개드립니다.
아래는 침묵의 세계 le monde du silence 라는 해양 다큐 라는 데요. 우연히 얻었어요.
1956년 루이말이 관계했네요. 유튜브 50분 짜리니까 그냥 보시면 되겠네요.
원본은 아니지만요.
Le Monde du Silence
http://www.youtube.com/watch?v=PYmLwbAbwJA
'침묵의 세계'는 최근 최승자씨 번역으로 새로 나왔네요.
지은이는 막스 피카르트이고... 제가 아주 옛날에 읽어서 누구 것인지 기억을 못했어요.
바오로 서원에서 나온 적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