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램 질로크
대도시는 현대성의 신화가 지배하는 장소이다. 대도시 속에서 놀이는 노역으로, 호기심은 물신성으로, 상호성은 횡포로, 즉흥성은 고역으로 변모한다. 인간 주체의 자연사는 부정된다.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은 부르주아의 실내로 자물쇠가 채워진다. 죽음은 제거되어, 특별한 장소에 한정된다. 시체는 일상적 지각 영역으로부터 사라지기에 현대 개인은 신체부패로 인한 공포에 직면하지 않는다. “영원성의 임시 거주민” 으로서의 중간 계급은 자신들의 불멸성, 그들의 가치와 질서를 영원히 보존하려 한다. 부르주아들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 죽음을 보려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보이지 않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각각 그들만의 ‘게토’에 격리되어 있어, 부자는 자본주의적 질서의 결과를 목격할 필요가 없다. 벤야민은 “브르주아는 더 이상 스스로 작동하고 있는 생산 질서를 보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가난한 자는 시야에서 벗어나고 관심에서도 멀어진다. 이들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감추어진다. 가난한 자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들은 숨겨지고 잊혀진다. 대도시는 현재의 가난한 자를 사라지게 하는 장소이며 도한 그들의 과거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드는 공간이다. 억압된 자는 대도시에서 ‘아주 먼 곳’을 차지하며, 역사에서 그들은 잊혀진 죽음이다. 도시 복합체의 기념물과 박물관은 지속적인 진보이자 승리의 행렬이라는 신화적인 역사 개념의 목격자이다. 도시는 자신을 영광스러운 문명화 과정의 정점으로 드러낸다.
-발터 벤야민
‘파사젠베르크’는 자본주의 시대를 형식주의적인 “모더니즘”과 역사적으로 절충주의적인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경향들은 산업문화의 시작부터 있어 왔던 것이다. 참신과 반복의 역설적 역학이 새롭게 반복될 뿐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순차적 시기가 아니라, 한 세기에 걸친 예술과 테크노로지의투쟁에 나타나는 정치적 입장이다. 모더니즘이 사회적 기능과 미학적 형식의 화해를 예표함으로써 유토피아적 갈망을 표현한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양자의 비동일성을 인정하며 판타지를 살려둔다. 이렇듯 각각의 입장은 부분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상품 사회의 모순이 극복되지 않는 한 ‘양자’는 새롭게 반복될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웃음에 관한 절을 복사했는데 붙여넣기 안되네요 ^^
댓글로 갑니다.
바로 이 때문에 보들레르는 웃음을 악마와 동일시했고 악의 원리를 보여 주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의 눈에 웃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학문의 관점에서 , 완벽한 힘의 관점에서 웃음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하다. 사람들이 현존하는 질서에 대해 확신하고 공동의 책임감을 느끼는 순간부터, 독단적으로 질서를 인정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부터, 이 질서는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을 믿는 최초의 방법은 그에 대해 웃지 않는 것이다. 웃음은 바로 미친 자의 것이라고 보들레르는 말한다. 그러니까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미친 사람들의 경우 미친 것은 그들의 잘못이다.하지만 그 경우에 질서의 잘못은 없는 걸까? 그렇다면 웃는 사람은 누구일까? 쇠락에 대해, 그러니까 주어져 있던 질서의 일시성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악인은 선악과에서 사과를 따먹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웃지않는 사람. 그리고 질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웃는 사람에 대해 내린 해석이다. ...........
웃는 사람은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사악하다. 그렇지만 웃는 사람은 웃기 위해서 , 그리고 자신의 웃음에 온힘을 싣기 위해서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며 <마음 속으로 부터 웃어야 한다> . 말하자면 그렇지 않을 경우에 웃음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