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세계: 시각 예술과 미디어 문화
-리자 필립스
모든 것은 모조 simulation로 재등장 하게 되었다. 풍경은 사진으로,
여성은 성적 시나리오 sexual scenario 로, 사유는 글쓰기로, 테러
리즘은 패션과 미디어로, 사건은 텔레비전으로 재등장한다. 사물들은
오직 이 이상 야릇한 문명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 그 자체가 여기서는 단지 어떤 다른 세계에서의 광고 카피로
대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쟝 보들리야르
특수효과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 세계 Image World- 원거리 전송, 채널, 피드 백, 녹음 재생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에 알맞는 환경을 낳는 인터페이스interface 의 특수한 미디어 문화-에서 살고 있다. 텔레비전은 새로운 우리 시대의 궁극적인 대상-완벽한 정적 수송 수단 static vehicle-이다. 영화는 움직이는 화면, 속도 감각 그리고 시간의 응축과 함께 소리를 전달해 주는 최초의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텔레비전 모니터가 모든 기능- 우리가 움직일 필요 없이 모든 것이 행해지게 될- 을 떠맡고 있다. 우리는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 쇼핑도 하고 은행 업무도 보고 데이트를 선택하거나 새 친구를 만나고, 먼 곳으로 여행을 하거나 학위를 딸 수도 있다. 전송의 속도가 차량의 물리적 속도를 대신했다. 즉시성의 집중적intensive 시간이 역사의 확장적 extensive 시간을 대신했다. 심지어 철학자 폴 비릴리오 Paul Virilio는 우리의 운명이 텔레비전 배우 teleactor 가 됨으로써 ‘영화가 되는’ –전혀 순환하지 않고서도 스크린 위에서 순환하는-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또한 머지않아 섬유광학의 도움으로 이미지를 망막에 직접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우리 신체는 스크린이 될 것이다.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의 대량 복제 및 그 유포는 현대생활의 본질을 변화시켰다. 포화상태의 광고, 호화 잡지, 영화 프로그램들 그리고 텔레비전의 침입이 있은 지 한 세기 동안, 현실에 대한 우리의 공동 감각은 그것이 사진과 자연 현상들에 관한 직접적인 관찰에 의거하는 만큼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다. 미디어는 또한 현대 예술의 본질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이미지 제작자로서 예술가들은 이 새로운 시각 매스커뮤니케이션 체제가 어떤 식으로든 예술의 전달 능력을 넘어섰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지난 30 여 년에 걸쳐, 그들은 매스 미디어의 증가하는 권위와 지배에 대한 다양한 반응-찬양에서 비판까지, 분석에서 실천까지, 논평에서 개입까지-을 통해 굴복하기에 이르렀다. 이 새로운 시각 질서의 우세는 대다수의 예술가들이 접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다수의 비평적 논쟁들을 일으켰다. 즉 누가 이미지의 제조를 조정하는가? 누구에게 전달 되는가? 미디어의 유혹의 전략은 어떤 것일까? 미디어는 시간과 역사를 순간들의 연속으로 와해시켰는가? 이미지 과부하, 단편화, 반복, 표준화, 전위dislocation의 기능일까? 이 모든 물음들이 미학에서부터 우리 시대의 주요한 문제로서 재현 그 자체의 본질로 관심을 돌리게 했다. 대부분의 경험이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의미가 그것들을 통해 구성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중심적인 것이 되고 있다. 예술가들 역시, 우리의 시각 세계가 바뀌었음을 인식해야만 했다. 이러한 깨달음은 예술의 기능과 그것을 규정하는 데 사용되었던 관례적인 지도 원리들의 전적인 변형을 촉진시킬 따름이었다.
역사적 발단
이미지 세계의 영향은 최초의 기술적 발견들- 아찔한 변화의 속도로 새로운 세대들에게 선도된 전기 배선, 영화영사, 휴대용 사진기 그리고 자동차- 이 폭주했던 금세기의 10년 동안 예술 속에서 스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1912~13 년, 브라크와 피카소가 신문조각들을 자신들의 큐비즘 콜라쥬로 편입시켰을 당시, 예술에서 채택되던 재료와 도상법의 영역은 대중문화의 영역을 포함할 만큼 상당히 확대 되었다. 1914 년, 마르셀 뒤샹은 현실 세계로부터 오브제와 이미지들을 추려 그것들을 레디 메이드 미술로 다시 선보임으로써 논쟁을 더 밀고 나갔다. 뒤샹은 그의 전 경력에 걸쳐 상업적 이미지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뒤샹은 수정된 레디 메이드의 초기 작품,<에나멜이 칠해진 아폴리네에르>(1916-17)의 사례에서 유명한 그림물감 상표인 사폴랭의 실제 광고를 이용했다. 그는 철자를 약간 바꾸고- (S) APOLIN(ERE)- 거울에 비친 소녀의 머리를 추가했다. 그의 다른 몇 몇 작품들은 위조수표나 자신의 얼굴과 비슷한 인물 수배 포스터를 이용하기도 했다. 뒤샹은 복제 세계에서는 독창성과 유일성이 점차 감소되고 틀짜기와 컨텍스트가 의미를 규정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소비 물품과 이미지들을 레디 메이드 예술로 도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이 오브제들을 예술 컨텍스트 속에 재위치시킴으로써, 예술을 상품 물신주의 commodity fetishism의 구조틀 내에서 규정하는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 했던 것이다.
베를린의 다다주의자들인 존 하트필드, 라울 하우스먼, 한나 회흐 그리고 게오르게 그로츠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려낸 이미지들로 자신들의 선전 선동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이목이 집중되는 영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포토 몽타쥬 개념을 발전 시켰다. 포토몽타주 작업은 바우하우스에서와 마찬가지로, 20년대 소비에트 미술에서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20년 대 초, 바우하우스 미술가들은 그들의 잘 알려진 상호 제휴 프로그램을 마련했는데, 이는 그래픽 디자인과 사진에 이른바 회화와 조각 같은 고급예술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해 주었다. 이 미술가들은 초현실주의자들 및 구축주의자 constructivist 들과 함께, 꼴라주와 몽타주의 작업을 사진이나 영화, 건축, 패션 그리고 연극 같은 대량소통 형태로 확장시켰다. 예컨대 상업 광고 형태로 등장한 매스 미디어나 할리우드 영화들의 예술 취향적 단편들을 이용해 기꺼이 작업하고자 했던 살바도르 달리는 1939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의 오락 부문에서 가구를 디자인하고 <달리의 꿈의 집>을 만들었다.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에 양다리를 걸쳤던 인물인 달리는 그의 기이하며 현란한 사적 양식으로 유명해졌으며, 그의 완전무결한 회화기법과 기이한 상상력은, 미치광이 같고 과잉적이며 극단적이지만 탁월한 예술가라는 어떤 대중적 신화를 축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39년,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고급예술과 저급예술, 그것들의 사회적 기원과 영향들 간의 차이를 명백하게 하기 위해 선구적인 논문인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썼다. 그는 양자 모두 19세기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띠고 등장했음을 지적했는데, 즉 고급(진정한) 문화는 부자와 교양인에게 봉사하기 위해, 키치-인조예술, 문화의 모조품-는 도시화된 신흥 대중들이 증대된 여가 시간을 즐기는 것을 충족 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린버그는 키치란 기계적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문화가 결코 이룰 수 없는 방식으로 재빠르게 우리 생산 자체에 편입된 일부” 가 되었으며, “그 막대한 이윤이야말로 아방가르드 그 자체에 대한 유혹의 근원”이라고 언급했다. 그린버그는 키치의 힘을 감지하고 그것이 고급예술을 오염시킬 수 있음을 경고했다. 따라서 1939년에 이미 몇몇 사람들은 고급예술과 저급 문화간의 전통적 구분의 붕괴를 예견했던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조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도록 촉구했다. 대량 제조된 광고 및 포장의 과장법은 우리가 시각적 소비에 탐닉하고 있는 이미지 중독자가 되어버린 것처럼 침해적인 것이었다. 오직 이미지 만이 중요해졌다. 즉 모든 것이 ‘보는 것’으로 존재했다.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우리는 시각정보의 연속적 흐름에 직접 다가갔다. 죠지 트라우는 ‘개인’이란 ‘2억 개의 눈금 위의 한 점’ 이 되었다고 평했다.
회화 역시 스크린을 재빨리 새로운 모델로 선택했다. 1962년, 로버트 라우젠버그와 앤디 와홀은 각자 사진 이미지를 직접 그들의 캔버스 표면에 실크스크린하기 시작했다. 잡지, 영화, 그리고 타블로이드에서 뽑아낸, 서로 충돌하며 일치하지 않는 실재 삶의 단편들이 <단지> 부가되거나 붙여진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전이 되었던 –‘평평한 화면’의 표면에 ‘수용된’ –것이다.
캔버스 위의 포토 스크린은 혼성 상태-일부는 사진이고 일부는 회화,일부는 판화-였다. 그것은 회화와 열등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간주 되었던 사진에 대한 편견을 뒤바꾸었다. 이들 작품들과 팝 아티스트 들의 여타의 많은 작품들에서 사진은 이미지의 기원이 되었다. 이 새로운 기법적 기술적 수단의 출현은 단지 예술의 형식들을 수정한 것만이 아니라 미적 대상 및 공식적 취미를 뒤흔들어놓으면서 바로 예술 개념 자체를 바꾸었다. 영국 팝 아티스트인 에두아르도 파올로치가 평한 바 같이, “전적인 기계적 수단들에 의해 야기된 이미지의 비현실성은 우리가 반 세기 동안 살아왔으나 아직 기존의 예술 형식에 대해 심각하게 잠식하지는 못한 새로운 현실에 상응한다.”
1950년대에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회화의 바탕을 뉴스 인쇄물로 활성화 시켰으며, 그 다음 전사와 실크 스크린 과정을 통해 이 바탕 이미지들을 강조했다. 그는 포괄적인 휘트먼적 민주주의 정신을 가진 세계를 도입하면서 캔버스에 이미지의 파편들을 가득 실었다. 그의 이미지들의 스크랩은 소음-광고 게시판, 계기판 그리고 영화 화면의 공간을 암시하는 회화적 공간에 대한 일종의 시각적 충돌- 을 창출했다.
와홀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즉, 그는 미디어의 과정들을 자신의 작품의 구성과 개념으로 편입시키면서, 미디어의 방법 그 자체를 내재화시켰다.
그는 미디어의 속성, 즉 비인간화depersonalization와 상투형과 반복에의 의존 그리고 표면에의 매료를 강조했다. 그는 기계적 복제의 전 구조를 물신화 했으며,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당신은?”이라고 말했다. 와홀에게 이미지는 그것이 아무 것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사실로 존재했다. 그는 반복이 이미지들에게서 의미를 박탈했으며 이미지들이 상품-그것이 지닌 유일한 가치는 교환가치뿐인 대상- 이 되어버렸음을 인식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와홀의 태도는 현대예술의 가장 심오한 가치들을 거부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는 예술가처럼 작업하지 않고,ㅡ오히려 이미지를 조작하고 자신이 상업 미술가였을 때 했던, 디자인의 종류를 결정하는 아트 디렉터처럼 작업했다. 그리고 그의 반복된 이미지들-상업 제품들이나 애도하는 재클린 케네디, 마릴린 먼로의 보도 사진 등-은 독창적인 것과 복제적인 것, 원본과 모조간의 대립-고급문화 전체가 언제나 의존해 왔던 대립-을 허물어뜨렸다.
1962년 시드니 제니스 화랑이 <새로운 리얼리스트>전을 통해 이 새로운 경향을 소개했을 때, 모든 팝 아티스트들은 비난의 세례를 받았다. 와홀의 동료들인 제임스 로젠퀴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 그리고 톰 워셀만은 모두 미국의 집단적 초상과 풍요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젼을 구성한 뒤범벅의 기호들과 소비제품들의 새로운 풍경화를 그리면서, 대중문화로부터 그들의 이미지와 테크닉을 끌어냈다. 그 이듬해에 발표된 리히텐 슈타인의 <이미지 복사기>는 이 시대의 기계복제 및 날조된 이미지에 대한 매료를 보여주는 적절한 상징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들은 팝 아트가 물질주의에 매료되고 상업적 가치들에 대해 뻔뻔스러우리만큼 대담하게 긍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박했다. 힐튼 크레이머는 팝 아트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 팝 아트가 “우리를 상품, 진부함 그리고 통속성의 세계와 화해시킴으로써” 광고미술의 영향과 그 차이를 분간할 수 없게 했다고 말했다. 어빙 센들러 같은 비평가는 “광고가 광고의 원리를 훌륭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팝 아트의 상업적 성공과 그것이 번지르르한 잡지들에서 수용한 노출을 불신했다. 팝 아트의 입장과 그것의 관음주의적 초연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다이어 예술재단에서 주최한 와홀에 관한 심포지움에서는 와홀이 <인터뷰>지의 표지에 이멜다 마르코스의 사진을 채택한 일이 지닌 의미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었다. 와홀은 이멜다가 정말 스타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스타나 스타를 남용할 가능성을 조롱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스타의 남용을 비판했던 것일까?
이 시대의 명백한 정치적 작품 중의 하나는 팝 아트의 신성화된 이상으로 간주되었던 제임스 로젠퀴스트의 <F-III>(1965)였다. 와홀이 50년대에 구두광고와 상품진열을 디자인 했던 것에 비해, 로젠 퀴스트는 광고판 페인트공으로 생계를 꾸려나갔었다. 타임즈 스퀘어 저 높이서, 그는 커크 더글러스와 린 폰테인의 추상적 단편들에 친숙해졌다. 그는 후에 이 체험을 끌어내서 그의 그림에 광고판 기법- 확대, 신체 일부분들, 연결되지 않는 조각들의 조립 구성-을 적용했다. 그의 최초의 환경작품이었던 <F-III>는 군사기술의 음모적 특성을 직접적으로 참조한 곡면의 그림을 펼친 것이었다. 이것이 1965년 로버트 스컬에게 당시로는 깜짝 놀랄 만한 가격인 60,000달러에 팔린 사건은 뉴욕 타임즈의 제 1면을 장식했다.
팝 아트는 자본을 가시화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이 하나의 산업이라는 것을 폭로했다. 지배문화에 대한 저항 아방가르드와 키치는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침식당했다1940년대 초,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이미 서구 사회의 모든 양상들이 대중 미디어 내에 흡수되는 보편적 대중성의 시대를 예언 한 바 있다. 이 예언은 팝 아트로 실현되었다. 비판적인 작업들이 바로 그것들이 비판하는 힘에 의해 포섭되고 있는 것처럼, 체제를 벗어난 입장을 주장한다는 것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의는 제도화되고 예술은 현상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기구 apparatus
여타의 예술가 그룹들은 미디어 문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저항 예술oppositional art에 대한 신념을 품었다. 국제적인 예술가 모임인 플럭서스는 팝아트의 전략적인 날카로움이 문화의 변형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팝 아트의 경박성, 이중적 경향, 그리고 비판적 개입 critical intervention의 결여 등이 반박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그들의 반예술 anti-art, 반취미anti-taste의 사례로서 곧 다다와 뒤샹-케이지의 전통을 들면서 자신들의 예술 미디어로서 매스미디어 문화 형태-영화,TV, 우표,신문 그리고 상업 제품들-를 이용했다. 그렇지만 팝 아티스트들과 달리, 그들은 상품으로서의 예술적 대상의 위치에 대해 대항 문화적 counter-cultural 입장을 취했으며, 매스미디어를 가장 극악무도한 이데올로기적 지주로 보고 공격했다. 그들은 용인할 수 있는 한계를 밀고 나아가 작품 속에 정치적 성적 풍자를 불어넣었다. 팝 아트에 비해 플럭서스는 의도적으로 한계적 주변적으로 머물렀으며, 결코 주류나 대량시장적 접근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플럭서스의 작품들은 일부러 값싼 재료로 만들어져 단명했으며, 시나 영화, 음향, 움직임, 그리고 사진이 오브제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것들 중
사실로서의 사진적 이미지는 개념미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떠맡았다. 1965년, 조지프 코수스 Joseph Kosuth는 황막한 언덕에 외딴 나무가 한 그루 서있는, 단조롭고 산문적이지만 사실적인 사진과 그것의 복사(즉 복사의 복사) 그리고 ‘사진’이란 말해 대해 사진적으로 확대된 사전의 정의로 구성된 삼부작 <하나 그리고 세 사진들 One and Three Photographs>을 제작했다. 그는 세 부분을 한데 합치면서, 즉각적으로 독창성과 유일성 그리고 재현에 만들어진 관례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해 “의미는 용법use"에 있다고 했다.
존 발데사리는 60년대 말 수공 물품의 거부를 표명하는 제의적 전시로서 그의 그림들을 불태웠다. 그는 예술을 뜻하는 모든 신호들을 아이러니하게 제거한 캔버스에 일련의 감광유제 작업을 한 후 이 거부를 하게 되었다. 코수스의 작품과 같이,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형식화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전달되는 고립되고 소외된 분위기를 지녔다. 이 초기 작품들에서, 발데사리는 훌륭한 사진의 관례들과는 대립되는 사진들을 일그러진 냉소적 표제들-예컨대 “예술가는 일련의 사실들의 맹목적인 전달꾼이 아니다” (1966-68) –과 결합시켜 이용했다. 이러한 위반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아마도 이 때문에, 그는 사진 (그리고 언어)을 독립적인 재현의 미디어로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다음으로 그는 영화 스토리 보드 형식을 채택하고 텔레비전 화면에서 곧바로 따온 이미지들과 영화 스틸들을 이용하여 의도적으로 서로 어긋나 있고 멜로드라마적인 내러티브를 전개시켰다. 모든 것은 미적 차원에서 벗어나거나 그것을 침몰시키게끔 고안되었다.
개념미술은 예술가에게 새로운 명령, 즉 탐구되어야 할 것은 ‘예술가를 얽어 매는 기구”임을 확립시켰다. 예술은 문화적 약호들의 유동적인 상호관계 내에서 구축된 사회관계의 그물망의 일부로 여겨지게 되었다. 재현이란 오직 개인의 상상적이라는 절대적 영역 내에서만 이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무엇인가를 의미하도록 허용하는 특정한 컨텍스트들 속에서 실현되는 권력의 기구인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미적 성질’과 ‘자율성’이란 더 이상 평가될 수 없으며, 그것은 예술가의 활동의 사회적 본질과 예술의 의미의 우연성을 드러내는 작품의 틀 짜기 framing였던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술의 분배와 수용의 조건들을 재배열하기 위해 좀더 다양한 공개토론과 컨텍스트를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광고 게시판, 서적, 잡지 지면, 텔레비전 스포트 그리고 록 클럽들은 통제된 공적 컨텍스트와, 발언 바깥에 있는 독립 세력간의 마찰을 낳는 작품의 장소가 되었다. 캐나다 예술가 아이언 윌슨은
1970년,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예술가들이 미디어 실험으로 나아갔다. 몇몇 이름을 들면 브루스 노먼, 리처드 세라, 비토 아콘치 그리고 키스 소니어 이다. 이들은 영화와 테이프를 제작함으로써 미디어 형식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확대해 나갔다. 세라의 테이프<텔레비전은 사람들을 실어다 준다 Television Delivers People>(1973) 은 과정을 중시하는 조각가들 조차도 미디어 논의들을 행해야 하는 강박심리를 가졌다는 증거이다. 이 시기는 제도 비판-그리고 예술이 신화를 해체하고 그 형식을 비판의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제도적 전략들을 비판할 능력이 있다는 것에 대한 공유된 믿음-이 만연했던 시대였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구조주의 그리고 후기 구조주의에서 사용되었던 맑시즘 이론이 예술과 그 역사를 고찰하는데 있어서 선호된 방법론이 되었다. 가장 강력한 제도 중의 하나인 매스 미디어는 면밀한 검토를 받게 되었다. 이제 예술가들은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접근해야 했으며, 미디어의 약호와 은폐된 장치들을 드러내기 위해 그 언어와 형식들- 미디어의 예술 지향 그 차가운 ‘사실적’ 거리-을 전용했다. 한스 하케는 명백하고 솔직한 정치적 접근 태도를 축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삶의 권리 The Right to Life>(1979)에서 나타내고 있듯이, 법인의 광고 캠페인들의 시각 구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뒤집어진 복사를 추가함으로써 법인의 공공 이미지의 익명적이며 비개인적인 겉모습 뒤에 있는 거짓과 은폐된 협의 사항을 폭로했다. 브렉 모델의 빛나는 순진무구한 얼굴 밑에서 우리는 미국 시아나미드 Cyanamid사 (브랙의 모회사)의 임신중인 여자 근로자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들을 위태롭게 만드는 독소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들에게는 보수가 더 낮은 직업으로 전직하든가 아니면 아기를 못낳게 되든가의 선택만이 주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불편한 제휴
1970년대에는 새로운 세대가 성년이 되었다. 이들 젊은 예술가들 중 많은 이들은 1961년 월트 디즈니가 창립한 캘리포니아 예술 연구소 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이 세대는 대중문화에 의해 양육된 텔레비전 로큰롤 세대였으며, 이미지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 들였다. 예술가들은 명성 만들기, 폭력 퍼트리기, 선정주의 라는 미디어의 논제들을 탐닉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잘 알고 있는 미디어에 유식한 사람들 media literate이었다.
이 예술가들은 예술가가 사회적 제도와 맺는 관계에 대해 비판적으로 의문을 던지도록 훈련되어왔다. 그렇지만 그들의 선배들과는 다르고 팝 아티스트와 비슷하게,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이 제도들에 대한 반대 입장을 주장할 현실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점차 냉소적이 되었다. 그것을 어렵게 만든 것은 예술에 대해 증강되는 대중의 인정과 예술이 미국인의 생활의 주된 흐름 속으로 흡수되고 있는 점이었다.
상품화를 거부하는 반 대상적 anti-object 예술을 만들고자 했던 예술가들은 관람객을 갖기 위해서는 미술관이나 대안 공간들에 어떤 종류의 제도적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종종 시장에 의해 반환 청구된다.)을 알게 되었다. 예술가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제도적 힘에 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함이 입증되었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통은 종국에 이르렀다. 예술가들이 여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이미지로서, 재현으로써 뿐이었다.
신흥세대의 예술가들에 있어서 개념적 수렴점이 되고 있는 것은, 우리는 단지 사물을 분절하는 형태들을 통해서만 사물들에 관해 알 수 있기 때문에 재현을 벗어난 어떠한 현실reality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77년 아티스트 스페이스 에서 열린 획기적인 <그림Pictures> 전시에 이들 예술가 몇몇을 소개한 바 있는 더글러스 크림프에 따르면, “어느 때보다도 유례없이 우리의 경험은 그림, 신문이나 잡지, 텔레비전과 영화를 통한 그림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직접적인 체험은 그림 다음으로 취급되어 쇠퇴하기 시작하고 점점 더 사소하게 여겨질 것이다. 한 때 그림이 현실을 해석하는 기능으로 여겨졌는데, 이제 그림은 현실을 강탈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림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잃어버린 현실을 폭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림이 자발적인 의미화 구조signifying structure가 되고 있는 지를 규정하기 위한 명령이 되고 있다.” 한 때 현실적인 것의 기호였던 그림은 텔레비전, 광고, 사진 그리고 영화에 의해 현실적 대상으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재현이 현실을 구성한다는 전제는 주체성 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성 gender의 역할과 정체성identity이 재현의 ‘효과’로서 보여질 수 있음을 뜻한다. 이는 특히 페미니즘 논쟁에 관심을 둔 예술가들에게는 당연한 탐구 노선이 되었다. 셔리 레빈은 초기의 꼴라쥬 그룹에서 패션 기사나 광고들로부터 여성 모델 들의 이미지를 추출하여 그것들을 죠지 워싱턴과 에이브라함 링컨의 실루엣 초상의 ‘배경’소재로 이용했다. 이러한 매스미디어의 여성 왜곡은 문자적으로 기록되고, 보다 광범위한 신화적 영웅이나 위대한 남성 지도자의 상징적 영역에 포함되고 있다. 신디 셔먼은 자신의 작품<무제 영화 스틸 Untitled Film Stills> (1977-80) 에서 자기 자신이 사진가 앞에서 연속 녹화 필름의 상투형들을 직접 연기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조정한다. 셔먼은 자기표현을 현존모델들(이 경우 모델들은 남성의 욕망에 의해 규정된다) 의 무한한 복제로 드러냄으로써 상품화의 논리를 역전시킨다. 사라 찰스워드는 1970년대 말엽부터의 또 다른 연작에서,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 지의 한달 속표지를 사진 복사하고 그런 다음 텍스트를 도려내어 마스트레드(신문 잡지의 사설난 위에 있는 한 난으로서 명칭, 발행인, 소유자, 편집자 따위를 기재한다), 레이아웃 그리고 사진 복제들만을 그대로 두었다. 지면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크기나 상호관계뿐만 아니라 연속 이미지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얼핏 보기에 바뀐 지면들은 무의미하며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의 결합을 나타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그것들은 어떻게 뉴스가 발표되고 누가 그리고 무엇이 중요하게 생각되는가 하는 것을, 그리고 여성의 재현이 놀랄만큼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원문 내용이 박탈되자 신문지면의 자율적 체제가 명백해진 것이다.
바탕 소재들과 그것들의 재조립은 단지 어떻게 사회적 현실과 재현이 우리를 ‘구속’하는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은 언제나 예술의 특성과 위대성을 규명해 왔던 유일성, 작가성, 그리고 독창성에 대한 논쟁을 제기한다. 개인적 창조성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독창성과 유일성은 이제 지배, 통제, 그리고 권한부여 라는 사회적 허구의 결과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 허구는 예컨대 리쳐드 프린스와 셔리 레빈의 재사진rephotography에서 공공연하게 표현됐는데, 거기서 바탕의 복제들은 약간의 변형에 의해 다시 재현되고 있다. 단지 이미지의 컨텍스트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이것들은 그 사회의 약호들과 그 특유한 비현실성을 충분히 드러냈다.
1970년대가 끝날 무렵, 점차 해체적deconstuctive방법이 무미건조하고 현학적이 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미국 예술가들의 미디어의 특수효과들의 직접적인 체험 및 어떻게 미디어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인식은 그들의 미디어 시스템을 통한 공상여행-그 비현실, 인공성, 비물질성, 그리고 복제-으로 출발시켰다. 예술은 미디어를 그렇게 강력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전략들을 더 이용하여 호화로운 스펙터클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작품들은 규모면에서 극적이 되었으며, 표현은 더 그럴듯하고 더 다채로와졌고, 이미지는 더 장엄해지고 구성은 좀더 그래픽하게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미학이 미디어의 마력적인 유혹에 의해 수정된 미 개념-소외되고 기묘한-과 함께 예술 담론에 재편입되었다. 이 언어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증오, 존경과 두려움, 의존과 분노가 뒤섞인 태도로 그것에 접근했다.
양립된 감정이 병존하며 소외된 욕망의 그림들이 등장했다. 로버트 롱고의 <도시인들Men in the Cities>(1979-82) 연작은 그 좋은 예이다. 롱고에 의해 입안되었지만 상업 일러스트레이터에 의해 그려진, 이 기념비적이며 실물보다 더 큰 소묘들에는 남녀가 번갈아 쾌락 아니면 고통을 암시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적인 것은 이와 유사하게 미디어와의 관계 속에서 애매해졌다. 그것은 그 소외된 이미지 속에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미디어의 기법들을 흉내내면서 공모하고 있는 것일까?
이 상황을 혼돈스럽게 만든 것은 몇몇 예술가들이 비판적 탐구의 정신과 관중을 즐겁게 하는 오락의 전략들을 결합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있다. 이 새로운 정치적 스타일은 재빨리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으며 창의적이고 고무적인 상품으로 제시됐다. 예술가들은 상업문화의 ‘연구개발’팀의 일원으로 등록됐다. 단지 상업이 예술의 ‘외양’을 택한 것이 아니라 80년대에는 아방가르드의 개념 그 자체가 대개는 유명인사인 예술가들에 대한 강조를 통해 하나의 상품판매전략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커티삭, 로즈 라임 주스, 앱설류트 보드카, 아마레토, 갭 같은 회사들은 필립 글래스에서 에드 루스카 에 이르는 예술가들의 지지를 간판으로 내걸었다. 지난 몇 년간, 예술과 오락 언론은 패션과 생활 스타일 난에서 예술가, 비평가 그리고 큐레이터들을 세련된 최신 상품으로서 끊임없이 기사화했다. 그렇지만 몇몇 예술가들은 곧 이러한 전개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권력을 재빨리 발견했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메시지를 위해 통상적으로 미디어에 의해 점유되었던 공적 공간의 재반환을 청구하기 시작했다. 정류소(데니스 아담스), 전자 문자판(제니 홀저), 이동식 포스터 (바바라 크루거, 게릴라 걸즈) 그리고 광고 벽보 (그랜 푸리)는 예술가들이 강력하고 독립적인 시각과 목소리로 예측된 채널들을 방해하면서 침범한 장소들 중 일부일 뿐이다.
예술가들이 지난 10년간 얻었던 명성과 성공은 하나의 딜레마를 가져왔다. 미디어로부터 빌려온 기호들을 분석하고 논평한 후, 예술가들은 이제 그 자신의 미디어 이미지를 대면하고 그것들의 동의consent를 구하는 데 있어 담당하는 역할을 고려해야만 한다. 갑자기 그들의 입장은 불확실해졌다. 즉 예술가들이 미디어의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전략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신들을 드러내기 위해서인가? 이론적 정당화가 활기차게 행해졌을 때에도, 그것은 개인적 유명세와 명성에 대한 관심에 의해 그늘에 묻히곤 했다.
제프 쿤즈는 우리 시대의 모순을 극사실화hyperrealization한 인물이다. 쿤즈는 팝 문화로부터 감상적인 잡담, 이미지, 그리고 희귀한 수집품들을 선택한 후 전문 기술자들을 시켜 그것들을 스테인레스, 도자기, 혹은 다색 나무로 호화롭게 만들어 거의 인간의 크기로 확대했다. 이 미국 청소년 문화의 이미지들-TV, 영화, 스틸, 광고 그리고 록 음악으로부터 추출된-은 그 자체가 영화 스펙터클의 구현이다. 작품의 효과에는 쿤즈 자신의 공적 이미지를 위해 그가 면밀히 고안해낸 PR캠페인이 부가되었다. 즉 그는 다양한 상황들 속에 있는 예술가를 묘사하고 있는, 에어 브러시로 정교하게 제작, 연출된 ‘광고’ 연작을 통해 스스로를 포장하면서 미디어 속에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조정했다. 이 상황들-건강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예술가, 교실 맨 앞에 있는 예술가, 동물 조련사로서의 예술가- 성과 권력의 이미지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사용하는 초완벽한 ultraperpect 광고의 세계를 훌륭히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날카롭게 초점을 맞춘다 할지라도, 이러한 메시지들은 결코 명백하지 못하다.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성의 느낌과 불신감만이 남았으며, 우리는 어떻게 이미지가 미디어에 의해 전개되는가를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의 힘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들의 마취적인 마력에 넋이 빠져있다. 때때로 예술가들이 미디어 이미지에 연루되고 있음이 하나의 제도-스스로를 소모시키는 아카데미의 유형-가 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유혹과 조작은 너무나 압도적이고 강력해서 예술가들은 그것들을 재구성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나중에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30년간의 활동들은 단지 하나의 이행기가 아니라 하나의 서사적 시나리오의 개시로서 비추어지게 될 것이다.
한인선 역
<21세기 문화 미리보기>,시각과 언어,
이글은 출간된지 십년도 넘은 책에서 발췌 하였지만 미디어와 예술간 관계의 질곡은 여전한 듯하고 -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해서 옮겨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