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깁니다. 글쓴이 로라 멀비는 맑시스트 페미니스트인듯한데 그녀는 맑스의 물신주의와 프로이트의 물신주의를 병행해가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재미있습니다. 

 

현대 문화의 맥락에서 물신주의 이론에 관한 몇 가지 생각

                                -로라 멀비

 

 

1970년대에 물신주의 fetishism은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반 할리우드 영화와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즘 이론이 가진 정치미학의 핵심개념이었다. 모든 해답을 안고 있는 보따리처럼 물신주의는 상당한 수의 개념적 욕구에 대한 응답이 되었고, 물신주의에 의해 제기된 관념들은 저술, 토론, 영화제작 속에서 현대 논쟁의 의제로 등장했다. 현대 문화이론의 의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믿음을 위해 지식을 기꺼이 정지시키는 것, 여성의 육체가 거세당했다고 보는 남성의 잘못된 시각에 반대하는 방어, 번지르르한 표층으로 파편화되고 재구성되는 여성성의 이미지, 소비 자본주의 시대에 신격화되는 스펙타클, 여성성의 성애적 스펙타클이 영화의 전개 과정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데 기여했던 할리우드 영화의 표면적 화려함, 영화적 기의 아래서 그 기표 및 기표가 지닌 특수성의 상실. 이런 논쟁들 속에서, 브레히트의 영향은 정신분석학 및 현대 기호학과 접촉했다. 더 나아가서 문화생산에서 가려진 과정들을 가시화하려는 의도가 있는 미학은 유비나 상동성homology을 통해 자본주의하의 번지르르한 상품성에 가려져 있는 노동력을 지적해낼 수 있었다. 이것은 기계시대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구성된 의제였다.

리얼리즘에 관한 현대의 비판들은, 형식적으로, 심지어는 물신적으로까지 이미지가 묘사하는 대상을 그 이미지가 재현하고 지시한다고 가정하는 시각의 신격화에 따라 리얼리즘 미학이 생성되는 방식에 주목해왔다. 페미니즘 미학에서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재현하게 하는 대상과의 간극을, 나아가 의미의 유동성과 비안정성을 가시화하는 개념들은 하나의 해방의 원천이 되어왔다. 물론 이러한 개념적 해방을 가져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이었다. 그것은 의미화작용signification안의 간극을 열어주는 역할뿐만 아니라, 주어진 기표를 그 기표의 명백한 기의에서 분리시켰던 전치displacement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는 이론을 제공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미지는 무언가를 지시하지만, 꼭 그 이미지의 도상적 지시대상iconic referent을 지시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에 미친 기호학 이론과 정신분석학 이론의 영향은 의미의 불안정성과 지시reference의 무한한 지연 속에서 쾌락을 찾는 포스트모던 미학의 보다 폭넓은 분지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얼리즘 미학이 기계시대 및 산업 자본주의 경제와 특별한 형식적 관계를 가졌던 것처럼, 포스트 모더니즘 미학은 새로운 경제적, 재정적 구조를 반영하는 듯 하다. 이제 지시의 문제는 이미지와 미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산업자본주의가 몰락의 징후를 나타낼 때 금융자본주의는 번성하고, 선진 자본주의 세계는 돈에서 돈을 만들어내고 노동계급의 노동력에 의해 생산된 가치의 외부 영역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경제로 재형성되는 징표들을 드러낸다. 이런 면에서 환율조정이 노동력의 착취보다 더 이득이 되는 선진 자본주의 경제에서 산업자본을 누른 금융자본의 성공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시의 문제를 제기한다. 가치의 가장 우선적이고 주요한 상징적 상인 돈은 이제 상품이나 상품생산만을 재현하지만은 않는 교환과정 내로 포섭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현대미학과 맑스 이론의 만남은, 문화 내 지시성의 상실 현상이 커뮤니케이션의 속도가 생산속도를 앞지르는 전자 기계시대에 근거를 둔 변형된 자본주의의 출현을 선포한다. 역사적으로 맑시즘은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권력의 정치적 불균등과 가치의 창출을 노동계급의 노동력에 의존했던 산업주의 시대에 형성되었다. 맑시즘이 자본의 불균등한 분배현실을 파헤쳐냈다면, 정신분석학과 기호학은 실재the Real 을 현실 속에서 절합 articulation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문시했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실재는 라캉의 무의식의 실재가 절합될 수 없는 것만큼이나 절합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분석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담화이거나 재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 분석학과 기호학이 담화나 재현의 원인을 분석해 보려는 시도와 미학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 방법이 자본주의의 테크놀로지와 경제의 물질적 현실reality내에서의 변동과 발전을 반영할 수도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론틀 내의 유동적 기표는 경제체제 내에서의 변동을 나타내는 기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맑스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자본주의가 진화하고 변동하고는 있지만, 경제력이 사회와 문화를 지배한다는 맑스의 원칙은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유용하다. 역사는 의심할 바 없이 재현representation을 통해서 구성된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재현들이 증상처럼 그 재현을 생성해낸 권력과 소급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원래는 그렇게 부정적인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물신주의를 다시 검토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정신분석학과 기호학 이론이 현대사상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을 고려함과 동시에 첫째로 나는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학에서 말하는 부인disavowl의 구조가 이 개념을 통해서 지시라는 난점을 재공식화할 길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논의할 것이다. 총체적 현실을 재구현하지 않고, 징후symptom라는 시각에서 역사를 고찰하고 암호를 풀어내는 것이 아무리 힘들다 할지라도 해독을 요구하는 문제들에 접근할 것이다. 둘째로 나는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이 재현과 그에 비대칭적인 지시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적 방법을 제시하는데 어떻게 유용하며 어떻게 역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를 고찰해 보길 원한다. 이 글은 결코 이런 문제의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현실을 재현한다는 어렵고 힘든 과제의 결과로서 형성된 물신주의 개념을 고찰해 보려는 것이다. 왜냐면 물신주의는 그 자체의 징후적인 구조 내에서 지시관계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현대비평은 지시의 문제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여파 속에서 제작된 미국영화에 의해 극명하게 부각된다고 지적했다. 영화라는 매체조차도 매우 다양한 첨단기술의 오락매체들의 발달로 인하여 이제는 노후해지고 주변화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기도 하면서 연구하고 평했던 두 가지의 다른 영화들 모두-스튜디오 시스템의 할리우드 영화와 할리우드의 미학을 부정하고 나선 급진적 실험영화-가 영화제작의 재정상태의 변동으로 인해 인식의 지평너머로 사라지거나 거의 존재위기 상태에 직면해 있단 사실이 더욱 영화가 과거의 산물이란 생각을 부추긴다. 실험영화의 도제방식과 할리우드 산업형태는 서로를 부정하는 가운데서도 상호의존적이었다. 그러나 이십 세기를 마감하는 지금, 양자는 모두 쇠퇴해 버린듯하다.  비디오와 텔레비전 시대의 영화는 예전 대중문화와 상상이라는 면에서 관객들을 매혹시켰던 힘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대중오락으로서의 경제구조의 핵심위치도 상실했다. 더불어 안방극장 시대에 반 상업적 실험영화를 한다는 생각도 결국 시들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화에서 발산되었던 매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영화관에서 가정용 비디오로 그리고 텔레비전으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소비형태가 변함에 따라 간텍스트적 지시관계는 확산되며 할리우드 영화는 광고나 락 비디오 같은 전자매체의 좀 더 복잡한 문화 풍토 속에서 지속적으로 인용의 출처가 된다. 물론 로널드 레이건 의 대통령 임기는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것이며, 레이건은 할리우드의 역사를 그 자신의 역사와 미국의 역사로서 직간접적으로 재현했다. 그러므로 할리우드 영화의 과거는 현재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할리우드 영화는 죽어가는 병석에서 일어나, 전성기에 누렸던 이미지의 힘을 그 다음 세대에게도 계속해서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현대 비평가들에 의해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 중 데이너 폴란Dana Polan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대중문화는 일종의 포스트 모더니즘 문화가 되어 버렸다. 사회의식의 안정성은 (덜 이데올로기화 되지도 않으면서) 하나의 거대한 스펙타클 쇼의 장관 속으로 용해되고, 수단과 방법의 유혹에만 집착하고 동시에 의미 있는 결과에는 무관심해졌다. 그러한 스펙타클은 진정한 물신화된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것 자체를 풍성하고 넓은 경험의 근거로서 인식하도록 한다.

 

정신분석학은 부인, 무의식의 기제인 전치라는 일치 과정 그리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포스트모던적 기표를 구별한다. 세 가지 경우 모두, 의미화 작용과 지시관계는 다양하다. 그러나 부인이라는 개념과 그와 연관된 물신주의라는 징후는 지시를 추방시킬 때 조차 지시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부인과 재현을 구분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아는 자신을 괴롭히는 바깥 세상으로부터의 요구를 막아내는 자신을 자주 발견한다.  이것은 현실로부터의 이러한 요구를 인식하는 지각을 부인하는 방법에 의해 달성된다. 이러한 종류의 부인은 자주 일어나며 단지 물신주의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왜냐면 우리가 그러한 부인행위를 연구해 보려고 하면 항상 그 행위들은 현실과 떨어지려는 불완전한 시도이며 미봉책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인은 항상 인정acknowledgement에 의해 보충된다. 상충되면서도 독립되어 있는 이 두 가지 태도는 항상 자아의 분열이 일어니는 상황에서 생성되고 종결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행위가 더 큰 (심리적) 강도를 지니고 있느냐에 달렸다.

 

 , 이런 의미에서, 부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속에 자신의 기원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결과 일어나는 전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부정한다. 단지 물신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라고 프로이드는 주장했지만, 부인이라는 심리적 과정은 프로이트의 물신주의 논의에서 처음으로 다듬어졌다. 부인을 통해 물신 대상물의 원인에 접근할 수도 있고 대상물의 충격적인 현상을 인식하기도 한다.  또한 물신들은 심리적 고통을 나타내는 적색깃발에 비교될 수도 있다. 정신분석학에 바탕을 둔 영화이론은 대중문화가 징후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한 대중문화는 집단적 환상, 불안, 두려움과 이 모든 효과들을 투영할 수 있는 거대한 화면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논의해 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중문화는 문화의 감춰진 부분을 대변하고 사회적으로 충격적인 소재를 왜곡과 위장을 통해 나타내는 형태를 창출한다.  풍성한 볼거리의 미학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망각하고, 그에 따라서 그 미학에 따른 전치의 과정은 지시관계에 대항하기보다는 외관상의 흥분과 지시관계의 궁극적인 부정에 더 관심을 보인다. 그렇지만 풍성한 볼거리의 미학이 현재 대중문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인의 구조에서 발전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결국 부인은 단지 원인과 결과 사이의 가느다란 고리만을 쥐고 있는 셈이다. 반면 부인이 시각의 극대화에 집중되는 작용과 기표가 전치되는 작용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감추어야 할 필요성을 은폐시키는 매우 튼튼한 장막을 생산해 낸다. , 부인의 미학은 지시의 문제에서 훨씬 멀리 의미화 작용을 이동시키는 전치의 형식적 토대를 쉽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인의 과정을 불러일으켰던 문화의 은폐된 부분은 행방이 더욱 묘연해지기만 할 뿐이다.

   넓게 말해서 물신주의는 인간이 만들어낸 대상에 자기충족성과 자율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물신주의는 알려진 것들을 부인하고 그것들을 믿음으로 교체하는 능력 그리고 불신을 중단시키는 작용에 달려있다. 그러나 물신은 언제나 자신을 유지시키는 매커니즘이 깨어지기 쉽다는 것 때문에 불안해 한다. 에이젠슈타인Eisenstein <10> 이라는 영화에서 신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통해 너무도 뚜렷하게 보여줬듯이, 물신들은 유난히 문화적 특수성과 연관이 깊다. 즉 한 문화에서 신성한 것이 다른 문화에서는 나뭇조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식이라는 것도 의식의 날개 속에서 방황한다고 할 수 있다. 옥타브 만노니Octave Mannoni의 유명한 말처럼, 물신주의자의 부인 행위는 전형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나도 잘 알아, 그렇지만…” 이 귀절은 영화가 관객의 불신을 어떻게 없애는 지에 관해 크리스티앙 메츠 Christian Metz가 논의했던 점을 상기 시킨다. 어느 관객이라도 그는 그 영화를 믿지 않아라고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속았거나, 누가 정말 믿으려고 하는 것에 상관없이, 모든 것은 마치 사실처럼 일어난다. 만노니가 물었던 것처럼, 관객이 잘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정됐다면, 잘 믿는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이 잘 믿는 사람은 우리들 자신의 다른 한 부분이다.

   영화의 물신대상을 영화자체의 기술적 초월성이라고 이해한 메츠와는 달리, 페미니즘 영화 이론은 영화의 성애화eroticization가 물신화된 신뢰성을 성공시키는 주요한 장치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성애적 여성성의 구축은 또한 물신주의라는 섭리에 달려있다. 영화에 있어서 물신주의는 또한 맑스와 상품물신주의라는 미학으로 연결된다.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인 대중영화는 구경거리로서의 상품과 화면내의 구경거리로서의 여성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이것은 다시 여성을 상품의 생산자보다는 소비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하는 현상과 연결된다.  이러한 일련의 연결다리들은 유사성들이 이미지에서 발견되고 나서 형식적으로 동일한 구조로 영합해가는 현상을 나타내는 공간적 지도화 혹은 지형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내포된 의미, 방향성, 중요성 등의 개념들은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유사점이 없는 대상들 사이에서 그 단어들 자체대로 떠돌 수 있다. 부인의 형식적 구조는 서로 다른 사회적 어려움들을 이어주고 볼거리를 부인에 대항하는 방어체계로 구축하는 보호적 연결 고리를 만들어낸다.

 

1960년 대 좌파의 위기의 여파 속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페미니즘 정치학은 맑스와 함께 프로이트를 정치적 의제에 도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대를 거친 페미니스트인 나 자신과 정치적 노선을 함께 했던 이들에게 맑스와 프로이트라는 이 두 이름의 배합은 거의 마술적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고, 서로 다른 이 두 이론을 타협하려는 욕망은, 마치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찾으려는 시도처럼 한 때는 고무적이면서 또한 좌절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합실험의 재료들은 주로 이미지, 재현, 미학이었고, 그곳에서 프로이트는 맑스보다 한 수 위였던 경향이 있었다.  한 때 맑스의 영역으로 그어진 사회와 경제 영역은 다시 한 번 세계의 중심부로 스스로를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것은 모순적으로 맑스에 영감을 받은 사회주의 체제들이 몰락한 시기였다. 이것은 서구에서 아직도 권력을 쥐고 있는 우파 체제들에 의해 초래된 그 어느 때보다 잠식적인 경제적 사회적 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몰락하는 공산주의는 어쩌면 상품물신의 허구가 큰 역할을 담당하는 자본주의 허구로부터 최후의 일격을 받았다. 마치 30년대의 메아리처럼, 정신분석학의 이론에는 한 때 전 유럽을 휩쓸고 프로이트를 유배시킨 파시즘과 민족주의에 관련된 맑스 이론이 필요하다. 동시에 세계정치가 반전을 거듭할수록, 남아있는 맑시스트들은 역사의 진보적 움직임을 압도하며 점차 힘을 얻어가고 있는 비이성적 요소들의 괴물적 존재를 유의해야만 할 것이다.

맑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함께 등장하는 물신주의는 두 이론가를 연결하는 무엇보다도 가장 값진 고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물신주의 개념을 엮는 뚜렷한 연결고리는 두 이론가 모두 정신의 거부 혹은 봉쇄 blockage, 또는 사회와 심리 영역 내의 상징적 가치체계를 이해하는 데 대한 심리의 공포증적 무능력을 설명해 내려고 시도하는 점이다. 그렇지만 물신주의에 관한 두 이론가의 다른 점은 같은 점만큼이나 중요하다. 맑스적인 물신주의 개념은 각인inscription의 문제에서 파생된다. 즉 가치value의 기호가 상품에 각인되는데 실패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상품물신주의가 판을 치는 것은 가치를 기호화하기 어려운 상황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반면 프로이트의 물신은 환상적인 과잉 각인에서 구성된다. 즉 뭔가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느낀 것에 대한 대체물의 기능을 위해서, 하나가 빠져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 숭배자들에게만 가치를 부여하는 기호를 설정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가치의 기호는 실질적 대상에 스스로를 각인하는 데 실패하고, 후자의 경우 가치는 대체물을 통해 상실된 자리에 지나치게 각인되게 된다. 두 이론 사이의 본질적 차이점을 고려할 때, 두 이론이 모두 각인이라는 문제와 각인이 상실된 지시의 준거점과 갖는 관계 문제 주변에 구축하는 기호학적 의미를 고찰해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유동적인 sliding 기표에 대한 개념은 현대이론과 미학에 아주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해도 현대미국의 대중문화가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역사와 집단성과의 연결을 상실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맑스와 프로이트에 의해 개념화된 물신주의를 분석하는 것은 기표의 위치를 분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이론이 모두 암시하는 지시관계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앞으로 진행되는 토론은 하나의 실험이다. 그 실험은 물신주의에 대한 이 두 개념이 서로 다른 점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기호학적 문제점을 짚어가는 방식에 따라 진행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호학적 문제점은 라캉에 의해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이라고 규정된, 표현을 넘어서는 무의식의 재료인 실재의 문제로 돌아간다. 문제는 이 재료가 사회집단의 영역 내에서도 현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말로 표현될 수도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바로 대중문화 속에서 표현될 수 있는 징후를 해독하는 것이 주안점이다. 문화분석가는 아마 의식의 언어에 접근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단지 이러한 부문들을 주목하고 그것들을 가시화 할 수 있는 수단을 공식화할 수 있을 뿐인지 모른다. 이 실험은 어떤 새로운 방식을 구상해 내려는데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정과는 반대되는 부인의 미학에 대해 논의해 보려는데 있다. 현대 기호학이론의 맥락 내에서 맑스로 회귀하려는 방식은 찰스 퍼스 Charles S. Pierce의 지표index와 도상icon 그리고 상징symbol의 삼각구도에서 출발한다.

맑스에게 상품의 가치는 상품생산자의 노동력에 귀속된다. 만약 이러한 노동력이 자신이 생산해 내는 상품에 스스로를 지표적으로 각인할 수 있다면, , 만약 노동력이 생산과정에서 소요되는 시간과 기술의 흔적을 실체적으로 남길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표, 즉 직접적 흔적에 의거한 기호는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가치는 교환에 의해서 성립되어야만 한다. 맑스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 다른 상품들이 어떻게 동일하게 취급되는 지를 보여준다. 하나의 상품은 거울처럼 비춰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동등한 가치를 지닌 많은 다른 상품들의 가치를 표현해 주게 된다. 이 단계는 퍼스의 도상과 유사하다. 또한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은 이 과정이 교환단계에 설정된 양자들이 서로 다른 한 쪽을 재현해야만 하는 라캉의 거울 단계mirror phase 와도 유사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가치가 이러한 반사과정을 통해 각인 될 수도 있는 반면, 가치는 상품의 현존 자체, 교환이 일어나는 만큼 반복되어야 하는 교역품에 의존한다. 확장된 생산, 교환, 유통과정을 거치는 복잡한 경제구조는 일반화된 기호체계인 돈이라는 표현수단을 발달 시켰다. 돈의 교환은 상징적 단계에서 행해지고, 가치의 표현은 언어의 추상적이고 유동적인 성질을 취득한다.  가치의 기호로서의 돈은 물건교환의 직접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가치의 주요원천에서 없애버리는 마지막 작업을 조장시킨다. 말하자면 지시대상은 생산과정에서부터 상품이 명백하게 자율적인 가치를 달고 등장하고 유통되는 시장으로 위치를 변경한다. 맑스에 따르면, 이렇게 자율적인 가치의 등장은 노동력을 가치 원천으로 위치시키는 것을 부인하는 상품물신주의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상품이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은 생산과정의 흔적을 삭제하는 데 달려있다. , 공장의 먼지, 기계에 의한 대량의 주조물에 의한 자국,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자 착취등과 같은 어떤 지표상의 흔적을 삭제해야 한다. 대신 상품은 더 높은 구매욕구를 일으키도록 경쟁하는 가운데 겉은 유혹적으로 번지르르하게 포장되어 시장에 선보인다. 돈이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교환의 수단으로 등장하는 반면, 자본주의는 상품을 이미지로 부활 시킨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아마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구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사성을 종교세계의 신비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세계에서 인간의 두뇌가 만들어낸 것은 생명을 가진 독립적 존재처럼 등장하고,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또한 인간 종족과도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품들과 함께, 인간의 두뇌가 만들어낸 것 역시 상품의 세계에 존재한다. 이것을 나는 물신주의라 부르는데, 물신주의는 생산품이 상품으로 생산되는 즉시 스스로를 노동력의 생산품에 부착시킨다. 그러므로 물신주의는 상품의 생산과 분리 시킬 수 없다.

 

여기에는 믿음을 위해 지식을 부인하는 하나의 완벽한 패러다임이 있다. 하나의 추상적 체계는 가치의 기원뿐만 아니라 그 체계를 만들어낸 상징화의 과정도 부인하면서 이미지로 회귀한다. 상품물신주의는 스펙타클로서 승리를 거둔다. 스펙타클로서 그 대상물은 이미지와 믿음이 되고 종교적이기보다는 성애적인 특성에 의해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관해 논한 <보기의 변증법The Dialectics of Seeing>이란 책에서 수잔 벅-모스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주된 단계화에 관한 벤야민의 지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벤야민에게 있어서 새로운 주마등적 도시풍경에서 중요한 것은 시장의 상품이라기 보다 진열된 상품이다. 사용가치만큼 교환가치도 실제적 의미를 잃었고 순전히 재현적인 가치가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성에서 사회적 지위까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은,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지라도 군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전시된 물신들 같은 상품들로 변형될 수 있다.

 

생산자는 소비자가 된다. 그리고 공예가의 노동력이 공예품에 드러나는 것이 필수적인 것과는 반대로 노동자의 노동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품구매욕구를 불러일으키는데 필수요건이 된다. 생산자 혹은 생산과정에 대한 어떤 지표상의 흔적은 상품에 노동력의 가치를 기입하는데 실패하는 가운데 깨끗이 지워진다. 한번도 건드리지 않은 듯한 포장과 철저하게 새로운 상품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어떤 식이라도 노동력이 상품에 표출되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대한 지적 성취와 상징체계로서의 경제체계의 조직은 자신의 이익을 계속해서 얻을 수 있다. 상품물신은 특별한 형태의 경제적 착취를 위해 교란적이고 은폐적인 어떤 것을 만들어내며 기호학적인 요소와 지형학적인 요소를 결합시킨다. 상품물신은 상징적 교환의 논리를 그 자체로서의 대상물 안에 가상적으로 투입시켜 표현한다. 그러면 그 대상물은 그 표면 아래 숨겨진 그 무엇의 환영적 타자성을 부여받게 된다. 표층과 심층이라는 이분법은 바로 정신분석학과 기호학이 전치라는 개념으로 도전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양립 불가능했을 맑스적 개념과 프로이트적 개념의 동의점이 나타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가상적 지형 내에서이다.

말하자면 맑스의 이론에서는 고유하게 물신적인 상품은 없다. 가치의 확립이 교환과 유통 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과정일 수도 있고,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노동력의 위치를 파악해 낸다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는 반면,맑스의 논쟁 내에서 상품물신주의는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지배하에 있는 사회들에게는 정치적 암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상품물신주의는 이미지와 물건들은 인간의 상상력과 쾌락을 위하여 재현이라는 가상적 체계 내의 믿음을 통해 얻어져야 한다는 강력한 유혹의 증거가 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적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오히려 화려하게 표명되는 대상물과 이미지가 기호학적 의미를 흡수하고 정서의 생략을 조장하면서 부인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프로이트는 짧은 논문 <물신주의Fetishism>에서, 남자아이가 여성의 육체에 남성의 성기관이 없는 것을 잘못 인식해 거세공포증의 원천이라고 지각한다는 데서 그의 물신주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그러한 심리적 사건은 부인, 대체 그리고 흔적찾기의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물신 대상은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기호sign역할을 한다.  대체물은 또한 하나의 가면으로서, 아무것도 없다는 충격적 광경을 덮어버리고 부정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그 대체물은 표면과 그 표면이 숨기고 있는 어떤 것 사이에 환영적 공간을 구성한다. 기호학적인 것과 지형적인 것이 서로 얽힌 이러한 혼란은 무의식 활동에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또 다른 차원도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물신대상은 또한 기념물의 기능도 한다. 물신대상은 결여의 지점(바로 물신대상이 감추기도 하고 대체하기도 하는)을 표시하면서 기념물을 재현한다. 그리고 물신의 구조가 여성의 남근이라는 개념에 대한 믿음을 고정시키면서라도 바로 그 현존을 통해 자신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안되는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공고히 한다. 물신이 자신의 원초적인 외상적 실재와의 접촉에 실패하고 자신이 증언하는 순간으로, 자기 자신의 역사적 차원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물신이 매우 자주 눈길을 끌어 모은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신은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반짝거린다. 물신은 지식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물신주의자들의 눈을 믿음의 유혹에 고정시켜야만 한다. 이렇게 표면에 대한 강조는 물신의 환영적 공간을 과장시키고 물체에 대한 고착이 쉽게 이미지로 변형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성적인 물신은 넘쳐흐르는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기원을 감춰버린다. 그러나 돈의 가치의 상징적 체계가 스펙타클로서의 상품물신의 모습에 필수적인 반면, 프로이트식의 물신은 성차 면에서 관건이 되는 상징적 체계를 정확하게 부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프로이트식 물신이 기념물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지표상으로 하나의 흔적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 상품 소비자에게 나도 잘 알아 그렇지만…”이라고 속삭인다고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성적 물신의 성애적 힘은 두 가지 다른 종류 둘 다 스펙터클과 부인 행위 사이에서 분열된-의 물신들이 가진 유사한 지형적 구조에 의해 상품을 지나치게 증식 시킬 수 있다. 영화이론, 특히, 페미니즘 영화이론은 최근 이러한 생략과 집중현상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생산과정이 눈에 드러나는가 드러나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영화이론 논쟁에서 결정적 위치를 차지해 왔다. 맑시즘 이론을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영화산업 도시인 할리우드가 스스로의 생산 기계와 기구들을 영화의 표면에서 삭제함으로써 그 나름대로의 특색적인 유형을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점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또한 상품으로서의 할리우드 영화는 장르 영화, 배우, 스튜디오 시스템의 전성기에,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떠한 감독의 특징조차도 삭제하면서 스스로 유혹을 창출해 내는 물건처럼 시장에 등장했다. 그러면서 영화에 따라붙는 화려한 장식들은 멋지게 다듬어진 화면 속으로 혼성된다. 생산과정을 강좌는 브레이트식의 실험영화 또는 베르토프식의 형식주의가 화면의 마술적인 매끄러움을 파헤쳐보려는 정치적 욕구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실험영화의 미학은 기계공 같은 영화작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영화의 기계적 진행과정을 시인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계적 과정을 거친 후- 혹은 그에 앞서- 의미를 생산하는 체계이고, 믿음을 선호하며 지식을 억제하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생산과정은 이미지를 양산하고, 이미지 구성은 매력을 양산한다. 페미니즘 영화이론은 영화가 여성의 이미지를 통해 비록 유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가장 완벽한 물신주의적 대상을 발견한다는 점을 논의해왔다.

 

화에 대한 프로이트의 물신주의 분석은 영화이론에서 긴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 논의의 한 요소는 특히 이 글과 관련이 있다. 화면 속의 여성의 이미지는 부분적으로는 구조상의 유사성의 결과로서 유독 화려한 장관을 연출해낸다. 정교하고도 극도로 인위적이며 화려하게 꾸미고 치장한 겉모습이 여배우를 표면에만 부각시키듯이 그녀의 표면은 영화의 반짝이는 정면 모습이 되어서 관객의 시선을 끌어 모아 생산과정으로부터 영화를 분산시키도록 한다. 이렇게 허약한 껍데기가 물신 자체의 환영적 공간을 차지하고, 상처 부위를 가리며, 상실된 것을 화려함으로 은폐한다. 이러한 껍데기는 공포영화에서 예를 들어 한 아름다운 흡혈귀가 고약한 점액으로 분열될 때 균열되어 자신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드러낸다. 또한 느와르 영화에서 아름다운 여주인공은 파괴적이고 거세적인 힘을 자신의 매혹적인 표면 속에 은폐한다. 동신에 이러한 구조의 전치작용을 촉진시키고 그에 따라 단지 약간만 연결되는 이미지와 개념들-표면으로서의 여성과 표면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매혹-은 함께 미끄러져 마치 자동문처럼 자신들 사이의 간격을 닫아버릴 수 있다.  그러한 환영적 공간의 지형은 의미화 작용의 변화에 하나의 수로 역할을 한다. 이것은 바로 표면에 등장한 性, 즉 여성의 육체에 대한 뿌리깊은 공포증을 없애는 성이다. 이러한 표면적 성의 문제는 페미니즘 영화이론가들이 최근 영화 화면과 영화시장 사이의 다리 역할로 분석한 것이다. 여기서 시장은 무엇보다도 여성 소비자가 가부장제에 의존해온 여성적인 것들의 금기에 대항해 물신적 방어물로 무장하고 자신의 성적 표면을 구축하기 위해서 상품들을 소비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결고리들은 장--고다르의 영화들, 특히 1968년으로 향하는 시기의 작품들을 연구하면서 떠오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2or3Things I Know about Her>들이 관심을 끌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평범한 노동계급의 주부로, 후기 자본주의 생활방식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소비상품을 마련하기 위해 쉽게 몸을 판다. 소비자로서의 여성과 소비되는 여성은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그리고 물론 고다르는 그의 작품에서 매춘을 하나의 메타포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차별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반자본주의자인 고다르가, 여성성과 상품을 매혹이자 수수께끼로서 유사한 것으로 제시한 것-양쪽 다 욕망을 불러일으킬 만큼 세련되게 포장되어 있으며 알 수 없고 파악하기 어려운 본질을 내포하면서도 은폐하는- 은 나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고다르는 여성에 관한 고대의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분위기(요부, 스핑크스, 모나리자)와 현대생활의 상품기능을 폭로하는 맑시즘적, 물질주의적 관심을 혼합한다.  이러한 양면성은 또한 고다르가 영화와 맺고 있는 열정적이면서 서로 상충되는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 한편으로 영화는 매혹과 성애적인 것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신비화와 망상으로 드러나는 그 무엇이기도 한 것이다. 고다르에게 있어서 영화는 무엇보다도 할리우드 영화에 의해 대변 될 수 있었다.

   성의 정치학, 물신화된 상품소비의 정치학, 그리고 영화적 재현의 정치학이 서로 겹치는 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관심이 여기에 존재한다. 그리고 여배우가 물신화된 상품의 형상이 되고, 또한 성에 대한 복잡한 사회적 담론에서 기표로 기능한다는 것이 하나의 접합점을 제시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오늘날까지 여전히 스타 시스템의 정점을 대표하는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와 같이, 특권화된 어떤 이미지는 여성의 화려함을 하나의 환상 공간으로서 대변한다. 이미지의 표면은 너무나 강렬해서 마치 그 표면은 뭔가 다른 것을 감추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뭔가 다른 것이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표면의 번지르르함은 여배우의 화려함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여성의 육체와 연결된 이름없는 공포를 어디까지 방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억압당하며, 그래서 결국 더욱 심하게 표면의 매력에만 신경을 쓰게 된다. 마릴린 먼로의 화장한 모습은 특히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매우 인위적이고 매우 가면 같아서, 말하자면 먼로는 자신의 연기의 인위와 빈약성 그리고 불안정성을 강조하거나 그러한 부분에 주의를 끌게 하거나 논평하도록 자신의 연기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62년 먼로가 죽은 후 앤디 와홀이 마릴린 시리즈를 제작했을 때, 그는 그 동안 상품들을 미국 생활 양식의 도상으로 숭상시켰던 것과 같은 효과를 먼로의 이미지에도 부여했다. 대량으로 생산되고 무한히 반복 소비되는 영화 스타의 이미지는 가치로서 나타나는, 하나의 등록상표 같은 주어진 외관에 의해서 구별된다. 와홀은 특히 마릴린 먼로의 얼굴이 지니고 있는 신화적인 특징 두 가지를 조명했다. 첫째, 와홀은 상품적인 면을 이용해 먼로의 모습을 단순한 캐리커쳐로 축소시켜서 하나의 표면 위에 쉽게 찍힐 수 있게 만들었고, 또한 자연스럽게 보이는 화장을 매우 인위적인 색깔로 대체해 얼굴 화장품의 그림이나 인쇄물의 화장품 역할을 하는 색감을 가지고 유희를 즐겼다. 상품을 주제로 하는 와홀의 다른 작품들과 연결해 볼 때, 마릴린의 이미지는 상품의 겉모습 자체의 표면성을 부각시키고, 환하게 반짝이는 노란 표면은 그 이미지가 지닌 수수께끼와 함께 가치라는 단어를 상기 시킨다. 그러나 예를 들어 와홀의 <마릴린 딥티치 Marilyn Diptych>를 보면, 와홀은 먼로의 얼굴이 불러일으키는 두 번째 특징을 지시한다. 화려한 가면은 나약하고 허약하며, 그 표면은 인쇄기가 지나가는 순간 부서지기 시작하고 먼로의 모습은 변형되고 쇠퇴한다. 여성의 화려한 가면의 다른 면이 흘러나와 눈앞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와홀은 인쇄물의 표시, 기표, 모더니즘적 발견의 주제라는 문제를 함께 제시하고, 여성적 표면의 지형과 그 이면, 즉 죽음과 쇠퇴를 암시하는 부분을 폭로한다. 하지만 은폐된 영역에 대한 이러한 시사는 와홀의 상품 이미지에 의해 압도당한다. 켐벨 수프나 코카콜라 같은 자본주의의 등록상표들은 이러한 물건들이 공장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인쇄과정의 소인은 (와홀의) 작품이 전 피츠버그의 한 노동자의 아들에 의해 생산된 것이란 사실을 은폐한 채 때로는 그 작품이 20세기 중반의 정물화로 인식되는데 기여한다.

영화산업에서 스타는 항상 마케팅의 주요한 매개수단 역할을 했다. 투자, 생산, 유통, 수익이라는 바퀴를 뒤에서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허울이기도 했다. 리챠드 다이어Richard Dyer<거룩한 육체 Heavenly Bodies>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스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시장에서의 이익을 위해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영화를 생산하는데 드는 노동의 일부를 감수한다. 스타들은 자신들을 상품으로 만드는데 개입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력의 제공자이자 동시에 그 노동력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혼자서 생산해 내지 않는다. 우리는 두 개의 논리적으로 구분된 단계를 구별할 수 있다. 첫째, 한 사람은 스타 이미지가 되기 위해 갈고 닦아야 하는 몸, 정신 그리고 일련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스타 자신만이 아니라 전문 화장사, 미용사, 의상 디자이너, 체중조절사, 운동코치, 연기 지도자, 무용지도자, 그리고 그 외의 다른 것을 스타에게 가르쳐주는 사람들, 고아고 기획자, 사진작가, 연예정보기자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러한 스타 이미지 제조의 일부분은, 모든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지만 결국 그 스타가 만든다고 할 수 있는 영화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영화를 두 번째 단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스타 이미지는 기계처럼 이미 주어진 것으로, 칼 맑스가 응결된 노동이라고 불렸던 것의 한 예가 된다. 응결된 노동이란 영화라는 또 다른 상품을 생산해내기 위해서 더 힘드는 다른 노동-극본, 연기, 감독, 관리, 촬영, 편집-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이어의 묘사는 확실히 남자와 여자 스타 모두와 연결되지만, 이러한 과정은 여성 연기자의 경우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몇몇의 스타들은 화면에서 연기한 가상적 인물보다 훨씬 더 상징적인 위치를 얻게 된다.

 여기서 여성의 영화적 이미지의 특수성에 관한 페미니즘 분석의 중심이 되는 두 이론을 짧게 나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라는 글에서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은 성애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훔쳐보는 관계를 갖게 된다고 논의한 바 있다. 이러한 관객의 시각은 영화의 이야기에 의한 허구적 세계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바라보는 것으로 전환된다. 나는 또한 이러한 이미지의 완벽함은 거세 공포증을 일으킬 수도 있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하나의 방어수단이라고 논의했다. 또는 오히려 표면에 대한 집착, 겉모습의 화려함은 이중적 공간을 생성해냈고, 그 공간에서 문제성이 있는 육체는 매혹적인 껍데기 안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나의 이론과 함께 또 하나 중요한 페미니즘 영화 이론은 화려한 가면의 개념으로 여성의 이미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매리 앤 도앤 Mary Ann Doane에 의해 진행되었고, 조앤 리비에르Joan Riviere 1929년에 쓴 <가면으로서의 여성성 Womanliness as Masquerade>이라는 글을 응용한 이론이다. 리비에르는 그 글에서 남성의 기대와 관련된 여성성과 그러한 여성성의 지속적인 구성의 어려움에 대해 논의하면서, 또한 유능한 여성이 경쟁관계에 있는 남성의 공포증을 완화하기 위해서 나약하고 수줍어 하는 모습으로 어떻게 자신을 가장하는가를 중점적으로 논한다.

 

그러므로 여성성은 남성적인 힘의 소유를 감추기 위해서, 또한 동시에 만약 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탄로가 나면 받게 될 보복을 피하기 위해 쓰는 하나의 가면으로 가정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도둑이 주머니를 털어 보이면서 아무 것도 훔치지 않았다고 뒤져보라고 반박하는 것과 같다. 이제 여기서 독자는 내가 어떻게 여성성을 규정할 지 혹은 어떻게 진정한 여성성과 화려한 가면 이미지 사이에 줄을 그을 건지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 의견은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이건 피상적인 것이건 관계없이 그것들은 모두 같은 것이다.

 

이렇게 여성성과 화려한 가면 이미지를 동일 성상에 놓는 시각은 영화에서, 특히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 정점을 찾을 수 있는데, 성애화가 시장에서 발휘하는 힘 속에서 그런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성애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영화의 앞면이 되는 반면, 비슷한 과정은 여성과 상품 사이에 존재한다. 영화이론들은 할리우드 영화와 여성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의 의식적인 연결고리들을 추적해 왔다. 이러한 연결고리들은 가부장제, 자본주의 생산구조, 영화적 상투성의 성애적 경제구조 내에서 화면에 나타나는 여성 육체의 물신화라는 점에서부터, 여성 육체의 물신화가 화면을 벗어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보다 넓은 사회적 관심 속에서 겉모습이나 화려한 가면이라는 개념을 일반화시키는 장치가 되어버리는 성애적 경제구조로 논의를 이동시킨다. 여기서 영화는 마치 욕구의 대상물로서 상점의 진열장을 바라보는 것처럼 영화를 바라보는 여성에게 욕구대상으로서의 주인공 여배우와 그녀와 관련되는 상품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 기능을 한다. 찰스 에커트Charles Eckert는 그의 영향력 있는 논문 <매시 백화점 진열장 안의 캐롤 롬바드 The Carole Lombard in Macys Window>에서 특정한 상업적 매듭들이 영화배우의 패션을 직장 여성이 살 수 있는 가격 내에서 대량생산되는 옷과 화장품으로 어떻게 바꾸어 놓는 가를 설명하고 있다. 매리 앤 도앤은 <욕망하려는 욕망The Desire to Desire >라는 자신의 책 서두에서 이러한 관계를 추적한다. 여성의 대상화, 여성이 잉여 가치의 생산, 물신화, 전시, 이익, 손실이라는 과정들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 등이 모두 여성을 상품의 형태와 유사한 관계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영화와의 관계에 대해서 도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화의 경제성과 관객을 염두에 두는 투자와 경향에 대한 조절성은 상품에 관련된 여성 주체의 논리-상품의 소비자와 담론의 소비자로서의 여성의 지위-라는 매듭 같은 경제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도앤은 영화의 대중관객이 노동자를 소비자의 위치에 갖다 놓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논의한다. 왜냐하면 잘 살고 상품을 축적한다는 똑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동일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영화가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정하게 여성 관객을 겨냥해서 만든 영화장르는 여성성의 한 특정한 이미지를 팔게 된다.

 

마치 여성의 몸에 이미지가 지닌 성적 경향이 모두 축적되어 있는 것처럼, 여배우는 여성관객의 모방을 제공한다. 그 과정은 소비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이 지니고 있는 동어반복적 본성을 강조한다. 여성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상품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환과정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대규모의 상품논리가 지닌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어떤 면에서 오류로 판정되는 것이 명백한,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족이나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이 굴절되어 육체에 대해 강렬해진 관심으로 나타난다. 육체는 점점 더 후기 자본주의의 관건이 된다, 상품화된 물건을 가진다는 것having-그리고 그것이 미리 가정하는 주된 간격과 차별성은- 은 출현한다는 것 appearing에 의해 대치되고, 소비자와 상품 사이의 간극을 이상하게 압축시킨다.

 

50년대에 미국은 30년대에 시작되었지만 2차 대전으로 인해 한동안 중단되었던 대량생산에 의한 옷과 화장품 그리고 영화의 화려한 마력을 민주주의로 표방했다. 미국은 이러한 이미지를 마샬 플랜과 냉전을 통해서 해외로 수출했다. 왜냐하면 헐리우드 영화의 마력은 자본주의의 성애적인 것, 상품소유라는 관계를 모두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물신주의의 원천은 어머니의 육체이다. 맑스에게 물신주의의 원천은 가치로서의 노동력을 삭제하는 데 있다. 이 두 가지 모두 상품 문화에서는 발언할 수 없는 것과 재현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어머니의 육체에 대한 억압과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노동력에 대한 억압이라는 이 두 가지 주제는 맑스적인 물신주의 개념과 프로이트적인 물신주의 개념을 각각 나타낸다. 이 두 가지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성차와 가치에 대한 구조들이 지형적인 요소들과 전치를 통해 서로 강화되고, 여성적인 것이라는 스펙터클을 상품의 성애화된 스펙터클과 연결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내가 이 글의 첫 부분에서 각인의 문제로 설명한 것 중의 하나인 두 종류의 물신주의의 중요한 차이점이 결국 문제로 남는다. 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문제점이 스튜디오 시스템의 할리우드 영화에 있어서 중점적인 것이고 그러한 영화에 의해 서술되었다는 것과 이 문제점은 최근 영화이론에 의해 가시화 되었다는 점을 제시하려고 시도해왔다. 이러한 분석의 몇 가지를 서로 병치시키는 것을 통해서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생산과정에 대한 부인행위는 여성을 성애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이미지가 완성됨으로써 힘을 얻는다는 이미 잘 알려진 논점을 되풀이하고 싶었다.  각인되지 않은 것에 지나치게 각인된 기표를 붙들어 매는 데는 하나의 논리가 존재한다. 풍성한 볼거리라는 번지르르한 스펙타클의 힘은 관객을 의문이나 호기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신주의 미학은 보여지는 것과 지식 속으로 분출하기 직전인 것 사이의 동요를 창출하는 프로이트의 부인구조(나도 알아. 그렇지만…”)에서 파생된다. 부인되는 것은, 거세 공포증이라는 불길한 공백이든 지식과 믿음 사이를 분리시키는 어떤 다른 위협이든지 간에, 정신에는 위험한 것으로 느껴진다. 같은 방식으로, 이미지의 자율적인 자기 만족성-가치는 이미지 자체 속에 위치해 있으며 생산과정 속에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한 위협은 헐리우드 영화의 응집력을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위험과 위기는 또한 형식적인 면과 이야기 구조 면에서 모두 흥미롭다. 또한 헐리우드 영화는 인정되어 왔던 것보다 더 많이 자체의 부인체계에서 일어나는 더욱 심한 동요를 이용해왔다. 이러한 눈속임 효과는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의 핵심이 되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참조성self-referentiality, 간텍스트적 지시관계 그리고 지각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성향에 대한 직접적 선언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 내에서 부인의 미학을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상징적 서열 내에서 정치적 억압 계급을 그리고 여성이라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부분들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재현과 역사적 사건 사이의 관계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는 때에 사회적 가상공간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재고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스펙터클은 현대 자본주의 의사소통 체계에서 증식한다. 동시에 전쟁, 가난, 질병, 인종차별주의 (인간의 사고에서 비이성적인 것이 지속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점증하는 징후들인)와 같은 형태의 역사의 현실은 현대이론이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호소하며 분석을 요하고 있다.  

 

윤정 <21세기 문화 미리 보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