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은 제가 매우 좋아하는 책입니다.

벤야민을 좋아합니다만 그램 질로크의 벤야민 해석이 참으로 좋습니다.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그램 질로크 1

 

부르쥬아의 실내는 공공영역의 사회적 활동으로부터 벗어난 견디기 힘들게 고립된 도피처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삶의 사유화privatiztion 19세기 부르주아 삶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그에 따르면 부르주아의 실존은 사적 영역에 의해 지배된다. 자연과 행위양식의 함축이 중요해질수록, 공공영역이 심하게 제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치적 갈등, 재정 상황, 종교, 모든 것은 이 감춰진 장소를 찾으려 한다. 이 점은 섹스, 섹슈얼리티와 육체에서 매우 명확하다. <일방통행로>에서 벤야민은 실내는 에로틱과 관능이 결합된 장소라고 주장한다. 그는 세속적인 삶은 에로티시즘이 사적 영역에 전적으로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공영역으로의 에로틱의 이동은 봉건적이고 프롤레타리아트적이다. 라고 지적한다. 현대 부르주아는 관능, 시선의 교환과 인간 상호 작용과 관계를 공적으로 부인하는 특징을 지닌다. 공적 공간 속의 신체 접촉은 대도시 군중과 부딪히는 불쾌함으로 제한된다. 섹슈얼리티는 가장 사적인 환경에 대한 암묵적인 금지와 연결되어 있다. 벤야민은 가족은 가장 수치스러운 본능을 벽장과 구석에 감추고 있는 부패하고 음울한 체계이다 라고 지적한다. 에로틱은 부르주아 가족의 음울한 체계와 그 썩어가는 활기 없는 가정으로 도주했기에, 생명력과 본래의 모습을 상실했다. 벤야민은 부르쥬아의 실내를 억압된 욕망의 어두운 망령에 사로잡힌 메마른 환경이라 여긴다. 열정은 거부되고, 섹슈얼리티는 기쁨 없는 육체의 인내로 축소된다. 실내는 에로틱이 감금되어 있는 감옥이다.

욕망과 섹슈얼리티의 대상은 전위된다. 에로티시즘은 상품물신주의로 변환된다. 실내는 현대성이라는 판타스마고리아의 장소이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쓴다.

 

이렇게 많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품 재고들은 오늘날 허름한 중고 가구 가게의 가장 누추한 곳이나 제대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일시적인 형태들이 그들을 대체한 아르누보의 형태보다 훨씬 더 견고 했다면, 당신을 집에 있는 것처럼 여유 있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 그것 속에서 느끼는 편안함은 수많은 세월 동안 산책할 때 달라붙은 냉담함이었다.  유행의 사소한 변화에 고분고분 따를지라도, 대체로는 자신과 사물의 영속성을 확신하여 마모나, 유산이나 움직임을 무시하고, 모든 사물의 종말처럼 보이는 종말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멀리 있는 많은 종류의 사물들이 군림하고 있다.

아파트의 편안함은 아파트가 주는 영구적이고 내구적인 느낌에서 유래한다. 실내는 도시의 다른 기념물들처럼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한 것으로서, 반복 동일성으로 남으려 한다.  벤야민은 부르주아 거주지의 잘난 체하는 자기만족을 지적한다. 도대체 나는 어떤 단어로 부르주아의 방에서 스며 나오는 안전에 대한 오래된 느낌을 정의할 수 있을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방어에 대한 독특한 생각이 그들의 결점을 말해주는 것 같다. 자신들의 편안함과 특권의 영속성을 확인하면서, 현대의 부르쥬아는 그들이 소유한 사물들과 공간들을 통해 자기만족을 표현한다. 이것은 그들의 근시안적이고 극단적인 어리석음을 말해주는 명백한 예이다.

파리의 이집트 오벨리스크나 베를린의 승전탑처럼, 아파트와 그 내용물의 진실은 오직 이후 삶에서야 명확해진다. 유행은 반복동일성에 불과하다는 폭로처럼, 여기서는 영원한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실내를 채운 상품들은 지속적이지 않은 일시적인 형상일 뿐이다. 실내는 거들먹거리며 맹목적으로 영원함을 확신하지만, 실내의 상품들은 악화되고 쇠퇴한다. 파사주처럼 부르주아의 실내는 한때는 유행했던 욕망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진부해지고 우스꽝스러워진 사물들의 안식처이다. 그런 인공물들은 중고가구 가게의 가장 누추한 곳으로 향하게 되고, 부르주아 거주지의 오만한 환상은 그 내용물의 최종 목적지인 고물상에서 비판적으로 드러난다. 부르주아의 아파트는 영웅적인 불멸의 외양을 채택하지만, 실은 부패와 분열의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중산층의 실내는 사물들이 소멸하는 장소이다.

벤야민은 블루메스호프에 있는 할머니 집에 대해 이렇게 쓴다. 이 집을 생각하면.. 나는 악몽과 마주친다.  실내는 병적이고 소름 끼치는 환경이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세기 후반의 가구 양식은 아파트의 공포가 소설의 역동적인 중심에 있는 탐정소설의 유형을 통해 적합하게 서술되고 분석될 수 있다. 가구의 배치는 치명적인 덫의 계획이며, 이어진 방들은 도주하는 희생자의 경로를 지령해준다.

 

벤야민에 의하면 가장 수치스러운 본능의 장소인 중산계급의 거주지는 19세기 탐정 소설의 핵심적인 장소이다. 이 공간은 시체에게나 적당한 집이다. 이 소파 위에서 아주머니는 살해될 수 밖에 없었다. 가구의 영혼 없는 사치스러움은 시체의 면전에서만 진정으로 편안해진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상하게도 실내는 죽음과 생명이 없는 장소이지만, 정작 죽은 육신 그 자체는 실내에 부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베를린에 있는 그의 할머니의 거주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죽음조차도 있을 수 없는 방들에서 가난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방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이 없다. 집 주인은 요양소에서 죽지만, 가구는 곧바로 중고 상인에게 넘겨진다. 그 방들 속에서 죽음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 방들은 낮에는 포근하지만, 밤에는 가장 가혹한 꿈의 무대가 된다.

 

19세기 후반의 부르주아 실내는,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장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이 흔적도 없이 제거되는 장소이다. 이 곳은 살인 무대이며 시체에게 적절한 장소이지만, 그 곳에 육신 그 자체는 없다. 이런 역설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벤야민에게 실내는 인간 육체의 자연사와 결부된, 부패와 소멸의 영역이다. 하지만 실내의 점진적인 분열은 죽음을 부정한다. 실내는 일시성의 부정과 영원함에서 유래한 중산계급의 가정에서 스며나오는  부르주아적 안전 이라는 의미에서 세월 없음이 된다. 죽음과 살인의 공간은 동시에 불멸의, 불변의 공간이 된다.

 실내에 대한 벤야민의 분석은 물질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 대한 부르주아 의 공포와 혐오에서 정점에 달한다. 죽음은 부르주아 가정에서 제거되고 병원으로 한정되고, 에로틱은 중산계급 아파트의 옷장과 선반에 감춰진다. 나폴리에서는 거지의 흉한 육체가 공공연히 전시되지만, 베를린에서 육체의 부패는 일상생활의 지각영역 밖으로 밀려난다. 죽은 육신은 살아있는 사람의 시선에서 떨어진, 특정한 장소에 있어야 한다. 부르주아의 질서는 모든 것이 예정된 장소에 있기를 요구한다. 사기꾼은 감옥에, 광인은 수용소에, 환자는 병원에, 죽어가는 자는 병원에, 죽은 자는 영안실에, 가난한 자는 멀리 떨어진 곳에. 그렇기에 비정상과 불온한 것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 벤야민은 여기서 푸코의 근대적 공공시설의 출현에 대한 분석을 예견한 듯 하다. 규율사회의 출현에 대한 분석에서 푸코는 감옥, 수용소, 진료소의 발달이 단순한 과학적 진보와 인도주의 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공간, 시간, 육체에 대한 우연성의 결합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19세기에 널리 퍼진 처벌의 양식인 감옥은 야만주의적 공개처형에 대한 공포의 반응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공간적 시간적 질서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간적 공간적 질서의 새로운 형식은 육체의 처벌로부터 영혼의 갱생으로의 변화, 공장 시간 개념과 처벌로서의 시간의 발생, 형벌 시설과 침묵과 고독의 감옥으로의 공간적 격리를 포함한다. 공적인 볼거리는 사적 죄의 뉘우침이 된다. <이야기꾼>에서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쓴다.

 

19세기에 시민사회는 위생적 사회적 시설과 사적 공적 시설에 힘입어 하나의 부수효과를 획득하였는데, 이 부수효과는 어쩌면 이러한 시설의 힘을 빌려 사람들로 하여금 죽는 사람을 보는 것을 기피하도록 하는데 그 잠재적인 주요 목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때 죽는다는 것은 각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공적 과정, 가장 대표적인 공적 과정이었다. 임종하는 침대가 왕좌로 변하는 사람들은 활짝 열려진 죽은 사람 집의 대문을 통해 이 왕좌로 몰려 들었다.- 중세의 그림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러한 죽음이 갖는 공적 과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세가 경과하면서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지각세계로부터 점점 더 멀리 밀려나게 되었다. 오늘날 시민들은 한번도 죽음을 접해보지 않은, 즉 영원성이 사라진 메마른 주거 공간에서 살고 있고 또 만약 그들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게 되면 그들은 그들의 상속자들에 의해 요양소나 병원으로 옮겨져 차곡차곡 안치된다. *: 벤야민이 보기에 살아있는 영속적 세계 속의 시체의 부재는 지혜, 경험과 교류할 능력의 상실을 유발한다. 삶의 일관성과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죽음에 대한 친밀성과 죽음의 가시성에 의존한다고 벤야민은 주장한다. 시체의 부재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의 심각한 장애이다.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이야기꾼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형벌이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그의 권위를 빌려왔다. 다른 말로 하면, 그의 이야기는 자연사를 참고한다.

 

부르주아의 실내는 죽음을 내쳤고, 섹슈얼리티는 비참하게 중지되어야 한다. 이 공간은 살아 있는 것의 생명력과 죽음의 완전성을 모두 거부한다. 그 결과 실내는 생명력 없는 메마르고 비인간적인 곳이 된다. 살인무대의 장소임에도 실내는 죽은 공간으로서 죽음의 공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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