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2

 

벤야민이 보기에 역사주의는 과거를 항상 사용할 수 있는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무비판적 개념을 가정하고 있다. 과거는 실제로 그랬던 것으로서 별 문제없이 현재의 이익에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역사를 연속성과 진보로 보는, 과거에 대한 역사주의적 화법이다. 벤야민은 역사를 그렇게 독해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자, 과거와 현재의 사회적 타협을 정당화하고 주장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진보의 교의는 새로울 것 없음과 지속적인 고통에 대한 망각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 벤야민에게 역사의 파국적 성격은 반드시 강조되어야 한다. 그는 현재는 파국이라고 정의하면서 파국은 진보이며, 진보는 파국이라고 덧붙인다. 신화의 지속을 부정하는 역사주의는 현대성의 판타스마고리아에 동참한다.

파리에 관한 후기의 저작에서 현대성의 신화는 더 이상 꿈꾸는 집합체가 아니라 반복, 물화와 진보의 개념이 빚어내는 새로운 구도에 의해 구체화된다.  벤야민의 비판적 과제는 이중적 작업을 의미한다. 첫 번째로 그는 늘 새로움 (유행과 신상품)늘 같음 (변하지 않는 상품생산의 세계와 그에 상응하는 소외)임을 폭로한다. 두 번째로 그는 늘 같음 (부르주아의 지배와 신화의 지속)은 일시적이고 한시적임을 밝혀낸다. 한 역설은 다른 역설로 변형된다. 19세기는 스스로 진보적이고 지속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벤야민에 의하면 19세기는 정적이고 하루살이처럼 순간적이다. 역사자체가 신화 속으로 뒤섞여 들어간다면 진보의 환영을 파괴하고 19세기의 반복으로부터 참된해방을 가져오기 위한 과제는 역사의 결을 거슬러 질주하기가 되어야 한다.

 

역사적 깨어남

 

벤야민은 <파사젠베르크>에서 그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이렇게 기술한다.

 

 지금까지 광기만 지배하던 영역을 기술하는 일, 원시림의 심연에서 유혹해오는 공포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 좌도 우도 살펴보지 않으며 날카롭게 간 이성의 도끼를 들고 전진할 것, 모든 영역은 이성에 의해 개간되어야 하며, 현혹과 신화의 덤불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지금 19세기라는 지역을 대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인용문은 벤야민이 계몽주의 사상이 해석하는 신화와 이성 사이의 관습적 이분법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이성을 행사하며 자연의 맹목적인 힘, 혼란과 같은 태고의 숲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지만 벤야민이 자유로워지기 위해 택한 방법과 수행과제는 계몽주의 사상보다 훨씬 복합적이다. 이성의 날카롭게 간 도끼는 신화와 현대성의 엉킨 실을 푸는 민첩한 손가락보다 유용하지 않다. 신화 제거는 이성을 통해 이루워질 수 없다. 세계의 마법풀기는 역설적으로 마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법이 현대성의 마법을 푼다. 따라서 벤야민의 변증법적 동화, 즉 우리를 노예 상태로 붙들어 놓는 마력을 깨뜨리는 이야기는 마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사쥬 프로젝트에서 대도시는 꿈 풍경이라는 초현실주의적 폭로는 현대 신화의 부정으로 변형되어 수행된다.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혁명을 위한 도취의 에너지를 얻기. 이것은 초현실주의 집단이 그들의 책과 작업에서 기획했던 것이다. 파사쥬 프로젝트는 그렇나 시도를 비켜가지 않고 그 시도에 참여한다. 비판적 이론가는 도시의 도취와 공범관계가 되지 말고, 도시의 유혹에 저항하고 도시의 야만주의를 벗겨내야 한다. 아라공과 브르통은 신화에서 도망치고 부정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화의 영역에 남아있다. 이것이 초현실주의적 기획의 치명적인 흠이다.

벤야민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세속적 깨달음에 필적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그들의 저작은 신화는 힘이 세다고 주장한다.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와 브르통의 <나쟈>는 결핍 증상을 보여준다. 대도시의 꿈의 세계속에서 벤야민은 현대성의 신화극복을 깨어나기와 역사의 비판적 힘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포착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프로젝트의 경향을 아라공과 구별하기. 아라공은 꿈의 영역에 머문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깨어남의 구도를 찾으려 한다. 아라공에게는 인상주의적 요소, 즉 신화가 남아있고, 이러한 인상주의는 이 책 안에 수많은 불분명한 철학적 언술들을 빚어낸 원인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의 공간 속에서의 신화의 해체이다.

 

벤야민이 꿈꾸는 집합체는 꿈속에서 표현되며, 그들은 깨어날 때 의미가 있다. 꿈을 꾸는 것은 기다림과 지루함처럼 위대한 행동을 하기 위한 전주곡이다. 벤야민은 모든 시대는 다음 시대를 꿈꾸며, 꿈꾸기는 깨어남을 추동한다.고 언급한다.* : 꿈꾸기라는 개념은 벤야민에게 고유하게 나타나는 신화 성격 이해의 명확한 예이다. 긍정적이고 동시에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신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벤야민은 또한 현대사회에 대한 일차원적이고 총체적인 비관적인 해석을 피하려 한다. 파리는 단순히 잘못된 의식의 장소, 즉 지옥의 장소가 아니다. 그는 이렇게 쓴다. 두 개의 거울이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 사탄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속임수를 시작한다. 사탄은 이런 방법 (연인의 눈 속에서 그이 애인이 그러하듯이)으로 끝이 없는 듯한 시야를 만들어낸다. 한편으로는 신성하며, 동시에 악마적이다. 파리는 거울과 같은 전망을 열망한다. 벤야민에게 파리는 성스럽고 동시에 사탄적인 거울의 도시이다. 그렇기에 연구 계획서가 지옥 범주의 포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1935년의 연구 계획서에 대한 아도르노의 불만은 기민하지만 동시에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꿈이라는 것을 깨달으려면,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사람들은 신화 속에 담긴 유토피아적 계기(꿈꾸는 집합체의 참된 욕망)들을 포착하고 이용하여 신화(강제, 반복, 물신성)를 종결시킨다. 따라서 파사주 프로젝트깨어남의 기술을 위한 시도이다.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자들보다 프루스트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프루스트가 삶의 이야기들을 깨어남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모든 역사 서술은 깨어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실 역사는 그것 외에 다른 것을 다루지 않는다. 역사는 19세기로부터의 깨어남을 다룬다.

깨어남은 역사적 인식에 의존하며, 역사적 인식과 함께 일어난다. 벤야민은 변증법의 규범은 깨어날 때 꿈의 요소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유자에게 모범적이며, 역사가에게는 긴급한 일이다. 신화는 두 가지 방법, 즉 사물의 이후 삶을 탐구함으로써 또한 변증법적 이미지라는 개념을 통해서 역사로 해소된다. 현대성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쇠퇴obsolescence. 벤야민에 의하면 초현실주의자들, 특히 브르통은 사용가치도 교환가치도 잃어버린 상품과 유행에 뒤떨어진 인공물 속에 있는 혁명적 가능성과 비판적 성격을 처음 깨달은 사람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대상은 상품, 도시 내의 상품 생산 과정과 교환, 소비를 탈물신화하고 탈신화화한다. 대상의 사후적 존재는 인공적 생산물 원래의 의도와 의미가 부정되는 심판의 시기이다. 대상의 참된 내용은 소명될 대 나타난다. 몰락, 즉 사물 표면의 부서짐은 그 안에 담긴 비판적이고 유토피아적 계기를 풀어놓는다. 린트너는 이렇게 말한다.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발견한 쇠퇴의 혁명적 에너지를 높이 평가했다. 19세기의 쇠퇴는 19세기의 유물을 꿈 세계의 요소와 어린아이의 세계를 자유롭게 풀어놓는 역사적 조건이다. 한때 유행했던 물건은 낡고, 멸시되고, 내쳐지는 우스꽝스런 물건이 되어버린다. 벤야민에 의하면 초현실주의는 코미디를 통한 지난 세기의 죽음에 다름 아니다. 벤야민이 보기에 현대적인 것은 이미 낡은 것이다. 유행과 진보 개념의 본질은 낡은 것이 새로운 체하며 분장한 것이다. 이러한 통찰이야말로 실제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수 있는 실현가능성이다. 잠들어 있다는 인식은,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변증법적 동화는 상품이 소망-이미지라는 소망의 성취에 관심을 기울인다.

오직 회고적으로만, 점차적인 소멸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대상의 참된 성격이 나타난다. 벤야민에게 이후 삶원사를 해명하며, 이후 삶은 신화의 부정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적 이해는 이해된 것의 이후 삶을 포착하는 것보다 근본적이다. 따라서 작품의 이후 삶이나 명성의 분석에서 인정된 것은 역사의 기초로 고찰될 수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인공물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적인 이해는, 앞 장에서 토론했던 기념물의 이후 삶의 중요성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소비자 자본주의의 물신화된 상품을 진열하고 수용하기 위해 부르주아가 건설한 기념물인 파사주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은 파사주가 급속히 시대에 뒤떨어져 낡은 것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183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파사주는 곧 매력을 잃었고, 황폐화되어 무시되었다. 파사주는 골동품과 기묘함의 본거지가 되었다. 벤야민은 파사주를 꿈 세계의 잔여물이라고 기술한다. 만일 현대성의 특징이 순간적인 것과 유동적인 것이라면, 현대성의 진실은 오래 끄는 자취 속에 있다.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의 건축물, 현재의 폐허들은 벤야민에게 매우 중요하다. 파사주 프로젝트는 19세기의 꿈의 폐허를 다루며, 파사주의 신화적 표면과 대상 속에 묻혀 있는 희망과 약속을 발굴한다. 가까운 과거의 이후 꿈은 꿈꾸기의 고고학을 부양한다.

초현실주의자처럼 벤야민은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서 진귀한 사물을 찾고, 다양한 요소들을 본래의 혹은 도발적인 구성으로 조합하려 한다. 벤야민은 현대의 사회적 형식의 성격과 경험을 도시적 존재의 폐기물과 사소한 일 속에서 드러내려 시도한다. 사소한 것, 혐오스러운 것, 어처구니 없는 것은 해독해야하는 중요한 실마리이며 구조해야 하는 귀중한 사물이다. 넝마주의는 그래서 벤야민의 구원의 역사적 실천을 위한 기본 모델이다. 그는 역사학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주장하는 일을 그만두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모든 것을 수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역사적 인식은, 한쪽 저울 접시에는 과거가, 다른 저울 접시에는 과거의 인식이 적재되어 있는 저울의 이미지로 구체화 될 수 있다. 첫 번째 저울 접시 위에 있는 사실들은 지나치게 초라하거나 많아서는 안되며, 두 번째 저울 접시에는 몇 개 되지 않는 무거운 추가 놓여질 수 있다.

 

벤야민의 목표는 재구성이지만, 재구성되기 위해서 인공물들은 맥락에 의한 질식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 벤야민은 말한다. 유물론적 역사기술의 파괴적이고 비판적인 계기는 역사적 대상들이 구성되는 역사적 연속성의 파괴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원래의 맥락으로부터 독립되면, 도시공간에서 발굴된 이질적이고 조화되지 않는 대상들은 상호 깨달음을 산출하는 대안적 패턴으로 병치된다. 벤야민은 <파사젠베르크>에서 초현실주의가 개척한 몽타주 기술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 : 볼린은 벤야민이 전통적 철학의 개념화와 가능한 한 유사성이 적으면서도 지식을 제시하는 도구를 찾으려 한다고 언급한다. 그렇기에 이미지를 지향하는 진리 접근 방식을 지향하는 진리접근 방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기본원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몽타주 원칙에 가깝다. 이 원칙은 관습적인 철학적 설화적 표현을 포기하고, 통찰력의 직접적인 병치라 불리는 접근방식을 선호한다. 몽타주는 벤야민의 파리 저작 방법론의 중요한 측면이다. 이 프로젝트의 방법은 문학적 몽타주이다. 나는 말할 것이 없다. 단지 보여줄 것만을 갖고 있다. 나는 가치있는 것을 가로채지 않을 것이며, 독창성 있는 공식화를 전유하지 않을 것이다. 부랑인과 쓰레기의 재고 조사를 하지 않고, 가능한 방법을 통해 그들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그들을 사용할 것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19세기를 비판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시각적 형식이 역사가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지로 파괴될 대 사용되어야 한다. 역사 유물론은 이미지가 되어, 詩的이 된다. 벤야민은 문제를 이렇게 제기한다.

 

고양된 시각성과 마르쿠스주의적 방법의 수행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길의 첫 번째 단계는 몽타주 원칙을 역사로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 우리는 아주 작은 요소,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구조의 요소들로부터 거대한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 이는 작고 개인적인 계기들을 분석하면서, 전체 사건의 결정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수천 개의 꼼꼼하게 정제되고 복잡하게 서로 연결된 개별적 요소들의 조합인 파사주의 철재 골격은 분석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벤야민의 역사 기술적, 텍스트적 실천의 모델을 제공한다.

벤야민적 역사의 건축물은 시각적 감각에 호소한다. 그의 과제는 현대 대도시의 조명이며, 도시 경험에 대한 통찰력 제공이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과거를 환히 비추는 역사적 전망의 기본 형식이다. 역사주의에 대한 아도르노의 거부가 변증법적 이미지의 발단이다. 벤야민은 썼다. 과거는 자신의 빛을 현재로 던지지 않으며, 현재 또한 자신의 빛을 과거로 던지지 않는다. 이미지는 그 때가 번개처럼 지금과 하나의 구도로 회동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미지는 정지 순간의 변증법이다. *: 벤야민은 이렇게 언급한다. 사유가 긴장으로 가득찬 구도 속에서 정지에 이르면, 변증법적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 이미지는 사유 운동 속의 休止이다. 듀나 반스는 이러한 개념화의 정신을 1934년의 소설 <밤의 나무>에서 이렇게 포착한다. 이미지는 불확실성 사이에서 마음이 만드는 중단이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과거와 현재가 그들을 분리시켜 놓았던 공간을 가로질러 서로 알아보는 일시적 중지이며, 깨달음과 중단의 순간이다. * : 벤야민은 이렇게 쓴다. 과거의 일부가 현재성을 획득하려면, 그들 사이에 연속성이 없어야 한다. 벤야민이 변증법적 이미지 개념을 조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은유는 번갯불의 섬광, 기대하지 않았던 돌연한 깨달음의 순간이다. 우리의 관심 영역에서 지식은 단지 번갯불의 섬광으로 존재한다. 텍스트는 번개 이후의 천둥이다. 이러한 유동적인 요소는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번개의 섬광이다. 우리는 그 때를 지금 속에서 알아볼 수 있게 그 때가 번개의 이미지로 섬광처럼 빛날 때 재빨리 포착해야 한다.

예기치 못한 번개이자, 순간적인 깨달음과 이미지의 포착인 변증법적 이미지는 역사적 스냅사진 혹은 정지된 영화 이미지이다. 코너스만은 이렇게 언급한다.

 

스냅 사진이라는 은유는 일시적인 기회의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고, 모티브가 돌발적으로 나타나며, 확립되어야 할 진리는 순간적이며, 우리가 행위하는 시공간 구도는 유동적이며, 과거는 현재와의 관계에서 깨달음을 얻는 이미지로 시각화 되는 것과 같은 역사기술의 조건과 양태를 특징짓는 몇몇 속성들을 예증하고 포괄한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벤야민이 다음과 같이 쓴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사진가가 인위적인 조작을 하고도 모델의 태도도 계획적으로 조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사진을 보는 사람은 그러한 사진에서, 미미한 한 줄기의 불꽃, 즉 현실이 그것에 의해 사진의 영상을 골고루 태워냈던 우연과 현재적 순간을 찾고 싶어하고 또 그 속에서 이미 흘러가버린 순간의 평범한 삶 속에 미래적인 것이 오늘날 가지도 이야기를 하면서 숨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도 미래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눈에 띠지도 않는 미미한 부분을 찾고 싶어하는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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